<창간특집>웅상의 역사를 말하다(9)
웅상은 역사의 중심체 였다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5년 07월 27일
웅상의 위치는 경상남도 끝자락이고 울산에 속해 있을 때도 울산의 끝자락이었으며 양산시청에 가더라도 부산시를 경유하지 않고 갈수가 없고, 인접해 있는 하북면 상북면에 가려고 해도 울산시 가운데를 횡단해야만 갈수가 있다. 웅상은 몇 천 년 동안 울산에 속해 있었다. 우리의 주권이 말살된 일제치하속의 1906년 웅상주민 단 한사람의 의사의 물음도 없이 다만 일본인들에 의한 행정으로 양산군에 속하게 되었다. 웅상은 역사상 전통성 생활군이 양산시와는 완전 다른 별개지역이다. 양산시와 경상남도에서도 울산시에서도 홀대를 받으면 살아왔고 현재에도 살고 있다. 하지만 웅상이 역사 가운데는 어떠한 지역이었는가 하면 부족국가때 통일시라의 기틀을 마련하는 가묘 역할을 했고 고려를 개국하는 과정에서도 중심에 섰으며 임진왜란 때도 전 지역민이 혼연일체 구국일념으로 임했고 6.25사변 동란 때 피난민의 수용소가 되고 야전병원이 되어 북진을 하기 위한 충전을 하는 지역이었다. 웅상의 옛 역사인 부족 국가 우시산국은(웅상 웅촌일때) 신라가 가야국을 점령하는 전진기지였다. 가야국을 점령할 수 있었던 계기는 우시산국이 신라와 병합의 기회를 가졌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동래 부산지역의 거칠산국(독도국)을 점령할수 있었고 이를 발판으로 동해바다를 통해 낙동강을 연결하는 해상교통로를 확보해 철기 문화가 엄청 발달한 대가야국을 점령하고 백제 경계지점(전라도 일부지방)까지 뻗어있는 노가야국을 점령한 후 철기문화를 이용한 실예무기와 농기구 제작이 활성화하여 살상능력이 탁월한 철기무기와 나무농기구보다 작업능률이 10배도 넘는 철기농기구와 우마를 이용한 영농방법은 생산효율을 12배이상 증가하게 했다. 양질의 철은 국제무역교역품이 되고 철기문화는 신라를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다. 이 여력은 백제 고구려를 무너뜨리는 힘이 됐으며 이에 더 힘이 되었던 것은 가야국 출신 인재들을 등용해 국력에 힘을 더한 것이었다. 수로왕의 후예 김해김씨 양주(양산) 도독을 역임한 김유신 할아버지 무력장군과 아버지 서현 장군과 김유신장군 같은 맹장들을 신라의 선봉에 세웠던 것이다. 김해김씨 문중에서는 양산북정 고분군중 주 분묘에 안장된 분이 김유신 아버지 서현 장군 내외의 묘소라 하여 묘사까지 모시고 있다. 그러나 문화에 관심을 가진 유력지역인사들 중에는 서현 장군의 묘소가 아니라고 부정을 하는 자들도 있다. 북정고분군의 규모는 경주 왕릉 규모보다 더 큰 규모다. 규모면에서 왕릉을 능가해 당시 신라 최고 권력 중에 있는 분의 묘임에는 틀림이 없다. 김해김씨 문중에서는 서현 장군 내외분의 묘소나 입증할 수 있는 각종 자료를 충분하게 확보하고 있다한다. 문화에 관계하는 분들과 협력하여 학계에 인정받고 교과서에 수록해야 할 일인데 영향력을 가진 인사들은 부정할 만한 확증도 없이 부정하는 일에만 앞장선다는 감을 준다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분묘에 안장된 분이 어느 분일까에 대한 연구는 검토 해야 할 과제이나 사명의식도 없고 건너 마을 불구경꾼의 자세이다. 이런 모습이 양산문화의 현 주소지이다. 하대, 중대, 대대, 삼호, 명동 등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은 우시산국의 국역을 가늠할 수 있고 우시산(한자)이라는 국가 명칭이 두음법칙에 의해 울산으로 지명이 되었다. 웅상지역은 울산을 잉태한 모체였던 것이다. 우리지역이 낳은 울산은 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영에 진입하는 큰 몫을 차지했던 것도 사실이다. 임진왜란 때 중앙정부에서 부산 울산지역이 국토방위의 최일선이라는 중요성을 인식하고 사전 대응했다면 외구들도 침략하지 못했을 것이고 침략을 했다고 해도 국토가 파죽지세로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지역이 홀대받는 것은 옛날도 그랬고 지금도 더한 현상이다. 모든 정책은 서울 경기지역을 위한 정책뿐이고 그 이외 지방을 위한 정책은 전무하다해도 무리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천년 신라가 고려왕건에게 폐망한 원인제공도 울산 동남지역의 호족장 박윤웅이 왕건과 제휴하여 신라를 포위상태로 만들어 신라국의 호족장들이 왕건과 협력하게 되고 투항해 신라를 약화시켜 패망에 이르도록 했다. 임진왜란시 임금과 고관대작들, 지방수령들 마저 백성들을 버리고 자기들만 살겠다고 도망가는 판국에도 백성들은 목숨 걸고 삶의 터전을 지켰다. 웅상지역 역시 백성들의 구국일념의 의기가 충만했다. 울산 선무원종 임난공신록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웅상에 거주한 의병장은 평산 창원 황씨, 입항 초이신 민중 매곡달성서씨 뭉호 명곡 울산박씨, 홍남 주남학성 이씨, 겸수 용당 울산박씨 경은이다. 이분들이 대는 의병의 수는 800여명 되었다하니 당시 웅상거주자 중 젊은이는 거의 다 의병이 되었다해도 과언은 아니며 전선에 나아간 가족을 뒷바라지며 노약자들이 영농에 임해야하니 웅상주민 전체가 임진왜란에 참전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웅상지역에서 봉기한 의병들은 웅상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울산지역 의병들과 합세하며 울산, 기장, 언양, 경주 전투에 참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로 인해 일본인에게 우리나라 군경통수권도 다 빼앗기고 왕은 허수아비가 되고 나라를 팔아먹은 대신들은 일본앞잡이가 되어 백성을 수활 하는 일과 자신들의 권력과 부의 축적에만 눈이 멀어 광분하고 국가는 무정부 상태가 되고 일본인들의 의지에 의해 국가가 경영되었다. 이런 지경인 1906년 부족국가 때부터 수천년 울산에 속해 있던 웅상이 양산에 속하게 되었다. 지역민 어느 누구와도 한마디 의논도 없이 일본인들에 의해 지역이 난도질 당했다. 천성산 넘어 양산과는 역사성 전통성 생활과 혈연학연이 완전 별개지역이다. 서창장 이외 5일 시장을 이용해도 남창장, 좌천장을 이용했고 우시장이 번성한 언양장, 울산장을 이용해도 양산장을 이용한 일은 없다. 부족국가 때 영역을 넓히기 위한 전쟁을 해도 울산과 동래 쪽과 전쟁을 했고 임진왜란 때의 의병들이 출병을 해도 경주, 대구 전투까지 가담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양산에 출병했다는 구절은 단 한 줄도 없다. 행정관청이 양산에 있다 보니 양산과 왕래를 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웅상주민이 양산 군청에 토지대장하나 발급 받기 위해 가도 새벽부터 나서야 해가 기울어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1980년 경 한 개의 군이 양산과 통합되다보니 어쩔 수 없이 학연의 연을 맺은 사람도 있지만 이전까지는 학연은 전무한 상태였다. 양산에 편입되고 한참 세월이 지난 후에도 유림들은 울산 유림에 참여했다. 항교 서원에서 교육받은 수강 항동도 울산지역에서 수업을 받았다. 우불신사 보존유지도 1960년경까지 울산 유림과 협력했다. 지금은 행정구역이 별개지역이 된 입장이라 울산에서도 웅상역사에 관한 기존기록들이 소홀하게 취급되고 양산은 기록이 전무하고 기록에 남길 거리를 찾는 이도 없어 100여년 넘는 세월동안 웅상의 많은 역사가 소멸된 것이 많다. 현재 부산 울산 중간 위치에 살다보니 대도시로 인한 혜택도 받지만 피해를 보는 일이 더 많다. 세무업무는 부산금정세무서, 검찰 법원 원호 업무는 울산, 농업진흥공사 관련 업무는 김해. 경상남도에는 10개 군이 있다. 어느 군도 인구도 세수도 웅상을 능가하는 군은 없다. 그러나 어느 군도 몇 개 시군에서 생활민원을 보는 군도 없다. 작은 건물하나 짓고자 해도 모든 개발행위는 울산시와 협의 없이는 불가능 하는 등 새로운 발상으로 나아가야할 과제가 너무 많이 산적한 지역이다. 필자가 평소 생각해본 과제만 열거해도 엄청난 분량이 될 것이다. 주민들이 겪는 불편을 해소할 과제마저 다 노출한다면 얼마나 많을까?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해 우수한 역사를 가진 지역이란 자긍심을 가지고 단결된 의지로 나아가야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웅상의 역사적 역할분담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대다수 주민들은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시급한 현실이기 때문에 대중의 관심으로 보편화되길 바라는 것은 과욕이다. 지도자나 자처하는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우리지역에는 문화유적이 너무 많다. 성터 구분군 도요지 제련터(점터) 취락지 등 선조들이 살아온 발자취 흔적과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 문화다. 문화유족이 있는 지역은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된다. 지정된 지역에는 각종 규제가 따르고 토지용도변경을 할 때 문화재 발굴을 해야 하는데 경비 상당 부분을 토지 소유자에게 부담토록 하는 제도는 정말 잘못된 제도다. 인접한 웅촌 대대리에는 넓은 면적이 도시계획상 주거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우리지역과 같이 우시산국 문화유족이 많아 건축행위를 하고자하면 각종규제가 발목을 잡고 문화재 발굴경비도 엄청 소요되고 기간도 많이 연장된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형상이 발생되고 있다. 이런 제도 때문에 일반지역에서 공사를 하다보면 유물이라도 발굴되면 쉬쉬하고 행여 규제지역이 될까 우려되어 매몰 또는 훼손 시켜 버리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이 상식화 되다 시피 되어 있다. 제도적 장치를 하는 관계가, 학자들의 의식에 더 큰 문제가 있다. 문화재 관련 학자들 다수가 문화재와 국민을 보호하려는 사명 의식은 없고 자신들의 권위에다 이권영역을 확대해야 한다는 의식이 우선이 돼 있다 보니 이런 의식에서 행해진 행위는 문화재 보호하는 허울을 걸고 국민에게 고통을 더 하게하고 문화재 훼손에 앞장을 서고 있는 실정이다. 역사의식은 나의 자존감을 지키는 일이다. 역사에 대한 의식이 빈곤한 정책입안자들이 이 나라 국민의 혼을 혼란스럽게 했다. 우리 웅상주민은 웅상주민다운 역사의식을 가지려는 노력을 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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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박극수 (현)웅상지 편집위원장 전 웅상농협 조합장 웅상주부합창 단장 천성산문학회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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