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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상의 역사를 말하다(8)/회야강과 우리 생활(환경보존지역해제가 없었다면 오늘의 웅상은 없다)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5년 06월 19일
회야강은 우리 생활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곳이다. 마을도 농경지도 강변따라 이루어졌다. 농경 생활에 필요한 농업용수도 식용수도 이곳에 의존 했다. 회야강이 있었기에 우리고장에는 선사시대부터 선조들이 터전을 이루고 우시산국이란 부족국가를 건립히여 이날까지 면면히 맥을 이어왔다.

아무리 많은 홍수가 범람할때도 회야강은 그 많은 물을 바다로 보내고 강바닥이 다 들어나는 심한 가뭄에도 장구한 세월에도 형태를 보존하며 묵묵히 지켜왔다. 웅상이 농촌형태에서 도시형태로 변모하는 과정에 가장 쟁점이 된 사안도 회야강과 관계된 사안들이다.

1981년 건설부로부터 사업인가를 받아 ADB차관자금으로 1982년 12월 31일 착공해 1986년 5월14일 울산시민의 식수원 공급을 위하여 건립 준공된 회야댐의 수원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1986년 7월20일 건설부 312호에 의거 회야댐 상류지역 웅촌면지역 24㎢와 웅상지역 1.5㎢ 용당 일대까지 환경보존지역으로 지정되었다. 당시 웅상은 소주공단이 확정되어 한참 공장들이 들어오고 있었고 웅상의 미래는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올 초석을 다듬고 있는중이었다.

이런 분위기에 웅상주민들은 부풀어 있는 중에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환경보존지역을 1차지정은 1986년 용당까지 하고 2차 지정은 1992년 명곡까지 하고 마지막으로 회야강발원지와 웅상전역을 환경보존지역으로 하고 그 후 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할 계획이였다. 울산시민들에게 맑은 물을 공급하기 위한 정책이라고 하지만 웅상 주민의 입장에서 볼 때 작고 초라한 집에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집뒤에 돈많고 권력가진 부자가 집을지어 앞집을 헐어라 하는 격이였다.

웅상지역에는 공장들이 계속 유입되고 인구가 급증일로에 있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모를 리가 없는데 상류지역이 이런 여건임에도 식수원댐을 건립하였다는 것은 웅상지역에 식수원을 오염시킬 원인을 제거할 제도적 장치를 사전에 마련할 계획이었음이 틀림없다. 환경보존지역을 지정하고 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할 계획을 댐건립 이전부터 해 온 것이다.

이런 위치에 댐을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관계자들도 댐을 건설하니 건설하나보다 하고 남의마을 불구경 하듯이 한 웅상주민의 자세도 통탄할 일이다. 환경보존지역으로 지정되고 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 모든 발전이 중단 상태로 되어버린다. 팔송노포에서 지경고개까지 아무런 변화없이 촌락마을 형태로 보존되는 이유는 그린벨트에 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지역이 개발가능한 지역이었다면 남산동이나 두실과 같은 지역이 되었을 것이다. 설상가상이란 이런 경우에 맞는 낱말일 것 같다. 환경보존이란 명제가 웅상주민의 발등에 불이 되었다. 우리 지역이 개발 불가한 지역으로 추락하는 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막아야한다며 용당마을 주민과 웅상주민들이 뜻을 같이해 환경보존지역해제 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투쟁에 돌입했다.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고 1989년에는 서창택지지구에서 수 천명의 주민이 모여 환경보존지역 해제 궐기대회를 했다. 웅상투쟁위원회에서는 웅촌투쟁위원회와 협력하여 조금이라도 관계된 부서에는 모조리 다 찾아 불이 나도록 방문하고 탄원도하고 호소했다.

당시 울산 시민인구는 90만명이었고 웅상,웅촌인구는 2만5천명 정도 였다. 국회의원 수는 울산시가 5명이고 양산은 김동주 한사람 이였다.
인적물적으로 열세였고 객관적 입장에서도 맑은 물을 제공하기 위한 정책이라는 명분이 강했다. 웅상면과 웅촌면민을 제외한 전국 타 지역에서 보는 국민적 정서는 얼마전 밀양에서 극열한 투쟁으로 벌어진 고압선 철탑 반대와같은 국민정서였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전력공급시설이 필연적 국가의 과제라는 명분이 국민정서에 동의를 구할 수 있었던것이다. 이런 난감한 처지에 처한 우리지역민들은 생존에 위협을 당한다는 절박감으로 죽음을 택하여서라도 해제해야 한다는 굳은 의지로 임했다. 정신적으로 말할 여지도 없는 정력을 다 했지만 경비 또한 엄청 소요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당시 경리를 맡아 엄청 고생을 하신분은 유명을 달리해 정확한 금액을 알 수 없지만 짐작하건데 5천만원은 능가했을 것이다. 당시 웅상 최고 상답,논값이 평당 1만원 정도였다. 당시 논값 5천평 값이 소요되었다. 지금의 5천평 값 마련하기보다 그때 논 5천평 값 마련하기가 훨씬 어려웠다. 그 과도한 금액을 어느 누구에게도 무리하게 요구한 일 없이 자발적으로 모금이 되었다. 많게는 5백만원을 낸 사람도 있고 기백만원을 낸 사람도 여러명 있었고 만원이하 몇 천원을 낸 사람도 많았다. 당시 앞장선 지도자들을 일일이 거명할 수 있지만 전 주민들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생략한다. 앞장선 지도자들은 구속될 각오를 하고 강력투쟁 일변도로 했다.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김동주의원 역시 국회의원직을 버릴 각오로 역할을 했다. 눈물겨운 모습으로 임했다. 김동주 같은 의원이 아니였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감동하고 감사해야 할 일이다.

투쟁방법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지만 지면이 허락지 않아 그만둔다. 지금 만약 지역에 그 당시처럼 대응해야 할 지역현안이 생겼다면 그렇게 할까하는 생각을하니 자신있는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때보다 부자들이 지역에 득실거린다. 그때보다 배운자들도 인구도 훨씬 많다. 지금의 5천평 값은 구석진 땅이라해도 25억은 될 것이다. 이 금액을 선금으로 모금한다면 그토록 쉽게 모금할 수 있을까하는 답변에도 구속될 각오를 하고 임할 젊은이들이 얼마나될까 의심이 간다.

세월이 빠르다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당시 앞장서 참여했던 분들중에는 가장젊은이가 지금은 60을 훌쩍 넘었고 장년층인분들은 세상을 떠났거나 팔순을 넘어섰다. 이런 일만이 아니라 여타지역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앞장서 일하는 분들은 물심양면으로 부담을 각오하고 일했다. 지금 젊은이들이 이런 각오로 일할까 노파심인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그때 해제 시키지 못했다면 읍으로 승격도 못하고 동으로 분동되고 출장소가 개설되는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며 아직 면으로 유지되고 있을 것이다.
지역모습이 도시화해가는 모습에 옛 농촌모습의 지난날을 그리워 하는 이도 많다. 아무리 세상에 서러운 일이 있다해도 배고픈 서러움보다 더한 서러움은 없다. 배고픈 서러운 순간마저 지나고 보니 아름다운 추억이지만 먹을거리 없이 당하는 배고픔은 너무서럽고 끔직한 일이다.

1991년 11월26일 환경보존지역해제 통보를 건설부로부터 받았고 1991년 12월13일 용당마을 회관에서 용당마을 주민들이 주관하여 유관기관장과 웅상주민 여러분을 모시고 자축연을 베풀었다. 당시 이장이었던 이승갑이장은 인사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목이 메어 말을 잊지 못했다. 이 시절을 모르는 젊은이들은 전설의고향이라고 들릴수 있겠지만 그때 전 주민들이 혼연일체가 되지 않았다면 어떨까 생각하니 한편으로 자랑스럽기도하고 한편 아찔할 따름이다. 회야강과 관련된 사안들이 계속 발생되고 있다. 하수종말처리장 증설도 빠른 시일내 대폭 증설해야 하고 회야댐 물을 식수로 사용하지 말고 공업용수로 전환하고 식수확보를 다른 곳에서 해야 한다. 웅상주민이나 울산시민들의 해결할려는 강력한 의지로 나아가야 할 과제다. 회야강은 우리의 생존을 지켜준 강이다. 우리 선조들이 이땅에 발을 들여 놓은 것도 회야강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시산국이란 부족국가가 형성된 권역도 회야강따라 이루어졌다. 이 권역은 인위적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린 자연적 권역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회야강물을 그대로 식수로 사용했다. 많은 어종들이 때거지를 이루어 서식했다. 중태기 피리 탱고리 참지름쟁이 미꾸라지 송어 메기 은어 황어 잉어 꾸무자(뱀장어) 가제 새우 민물귀(게) 등 어장을 방불케 했다.

공장폐수와 생활오수로 인하여 생태계가 변화되고 회야댐 건설로 인하여 어로가 차단되어 바다와 강으로 오간 어종은 멸종의 강이 되었다.
어떤 경로에 의하여 서식하게 되었는지 외국 어종인 베스가 장흥저수지 시명골저수지 탑골저수지등에 왕성한 번식력을 자랑하며 서식하고 있다. 더 많은 공장 더 많은 인구가 운집할 수 있는 여건도 조성해 가야하고 항사 물이 흐르는 강 여름이면 물장구치고 겨울이면 어름지치던 추억이 어린강 옛날 서식했던 생명들이 돌아 올 수 있는 회야강으로 만들이 갈려는 노력을 기울어가야 한다.

ⓒ 웅상뉴스
■약력 시인 박극수(현)
웅상지 편집위원장
전 웅상농협 조합장
웅상주부합창 단장
천성산문학회 회장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5년 06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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