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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상의 역사를 말하다/1900년대 웅상 최고의 유학자 학성이씨 이규락의 삶(2)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5년 05월 08일
토지개혁으로 대지주들은 농지를 국가에 몰수당하는 것과 같은 입장이었다. 그 중 규락의 집도 한집이었다. 규락의 집은 토지개혁 이전에는 삼백석지기를 훨씬 넘는 지주였는데 외지에 농지를 많이 소유했던 곳은 울주군 삼동면 출강 인근에 몇 만평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토지개혁으로 외지농지는 모조리 수용되고 농지 현실가의 일부 가격으로 정부 임의로 정하여 그것도 일시불로 받는 것이 아니라 장기간 나누어 받았다.
대지주들의 농지는 빼앗다 싶이 하며 소작자들에게 농지를 헐값에 장기연부로 매입하게 하여 농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업무를 주도한 부서는 농림부였고 농림부 장관은 조봉암이었다. 농지가 한 평도 없는 농민들이 많고 대지주는 더 많은 농지를 확보해 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토지개혁이 시행되지 않았다면 전 국토 농지는 대지주 몇 사람이 다 차지했을 것이다.
토지(농지)개혁으로 많은 농지가 수용되고 고향에서 규락의 집이 자경하는 농지는 그래도 소유하며 경작할 수 있어 참 다행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모든 유품과 문집 문서를 정리하던 중 아버지가 1905년 고종황제로부터 받은 교지가 나왔다. 이종우(李鍾右)에게 종 2품 가선대부의 직분에 명한다는 칙서였다.
이 칙서를 보기 전에는 이런 칙서를 받았는지 본적도 없고 들은 적 없는 사실이었다.
종2품의 품계는 학성이씨 시조예 할아버지의 최종 받은 품계와 동일한 품계이다.
아버지가 과거 응시하여 받은 품계라면 고위관직생황을 하였을 것인데 내가 아는 바로는 아버지가 단 하루도 관직생활 한 일은 없고 아버지가 어머니로부터 관직에 나아갔다는 말을 들은 적도 없다.
그때 우리나라 조선의 실정은 국력은 쇠퇴하고 국가재정은 극히 어려운 지경이었다.
이완용등 친일파가 권력을 장악하고 일본인들의 강요에 의해 을사조약을 체결해 우리 국권이 유린당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아버지 연세가 40세 초반이었는데 규락의 집이 경제적으로 가장 번성할 때라고 한다. 어떤 과정에서 종2품의 품계를 받았는지 추정해 보면 자의가 아닌 권력자들의 강압에 의해 치욕적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상당한 재정적 부담을 하고 실권도 없는 종이 짝에 불과 한 품계를 받았을 것이다.
역사기록이나 구전을 통해오는 사실이지만 부정한 관리들이 매관매직했다고 하고 성행했던 시절에도 경복궁을 짓다 재정이 바닥나자 재정을 감당하기 위해 공공연하게 매관매직을 했다. 이때 가장 많이 내려졌던 품계가 종2품 가선대부와 정3품(당상관)통정대두가 많았다.
이런 맥락에서 아버지도 품계를 받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규락의 아버지가 교지에 대해 한 마디 말을 하지 않았을 리 없다.
자녀들이 건강하고 착하게 자라주어 고마웠다.
자녀건강에 대해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지만 한때 너무 걱정스러운 순간이 있었는데 아들(동일)은 영남에서 최고 명문인 부산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고 재학기간동안에도 성직이 우수해 서울대학에 무난하게 합격할 것 같았는데 고등학교 3학년 때 건강이 좋지 못해 학교 출석을 하지 못한 날도 많고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이 될 입장에서도 그간 실력만 믿고 서울법대를 지원했다 낙방했다. 일류대학 가는 것 보다 건강회복이 우선이기에 병치료를 위해 1년을 쉬다 부산상대에 들어가 졸업하고 대학원에 입학했다. 교수들이 학교에 남아 대학 강단에서 강의하기를 상당히 권했지만 국제신문사에 들어가 기자로 활동했다.
논설위원장은 변노섭이었고 월간 조선의 주필 조갑제와 입사동기로 언론 대부가 된 사람들과 경쟁하며 기자생활을 했다. 포항제철에 들어가 중견간부로 근무하다 에베레트 기선회사로 옮겨 관리직으로 근무할 때 웅촌 검단 밀양박씨 댁의 귀하게 자란 고명딸과 결혼했다.
착하고 용하고 천상여인의 모습인 며느리는 학교에서 교원 생활도 충실하게 하면서 가사일도 잘 꾸려가고 2남 2녀를 낳아 잘 길러 주었다. 큰손자는 형님 후손으로 결정하고 작은 손자는 규락의 후손으로 결정했다.
ⓒ 웅상뉴스
조상님이나 부모님이나 형님이나 저승에서 만나도 할 말이 있어 참 좋다.
형수는 우리 집에 시집와 진작 남편을 여의고 60여년 성상의 세월을 아내와 한집에 살면서 때에 따라 모녀지간처럼 언니동생처럼 친구처럼 서로 협력하며 의지하고 살아 왔는데 이 모습은 우리가정의 가장 자랑꺼리라 자부한다.
가정인심은 안 식구들이 만들어 낸다. 형수와 아내는 좋은 가문에서 성장해 그런지 언어며 행동거지가 여성들의 본이 될 만한 품행이었다. 가족에게나 찬지나 이웃 간에 우의를 돈독하게 하는 모습이나 특히 머슴들과 식사 때 가족들과 똑같은 상에서 식사를 하게 했고 물 한 대접 먹걸리 한 사발을 줄때도 어른들에게 올리는 공손한 자세로 주었다. 머슴이 거처하는 방청소도 이부자리까지도 가족들의 것과 같이 해주었다.
언어 한 마디라도 하대하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마을 머슴들이 시태바리는가 싸가지고 간 점심을 펴 놓고 먹을 때 언제고 우리 머슴밥이 제일 흰쌀밥이고 찬도 제일 좋은 찬이란 말을 여러 차례 들었다. 머슴들끼리 놀면서 하는 이야기를 엿듣자 들은 것이 아니라 사랑방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 중 ‘고을원을 할 것이냐? 중계댁 머슴살이를 할 것이냐’하면 중계댁 머슴살이를 한다고 했다. 이런 집안 인심을 만들어간 형수와 아내에게 고맙고 미안할 따름이다.
제사도 만만찮게 많았다. 기제사 년12회 명절차례2회, 14차례에 걸쳐 제사를 모셔야 했다. 외삼촌이 계시지 않아 외조부보님 제사도 모시고 묘지성묘도 우리가 했다. 형수와 아내는 말 할 여지도 없고 전 가족이 정성으로 제사에 임했다.
형수는 1991년 7월 5일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아내는 2년 후 1993년 5월 9일 74세의 나이로 떠났다. 장례의식이 세월 따라 급변하여 1년 상 치루는 사람도 마을에서 아무도 없었다. 3일 탈상이 대다수였고 간혹 절에서 49제때 탈상하는 집도 있었다. 딸들은 다 시집가고 아들 며느리는 직장 따라 외지에 가 생활하고 형수와 아내가 세상 떠나니 나 혼자 남아 생활 할 수밖에 없었다. 아들 며느리가 집에 들어와 살겠다고 했지만 책도 보고 글도 쓰고 불경 외우며 살리라 하니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저녀들 보기에는 형수와 아내 탈상을 3일 만에 하고 혼자 빈소를 차려 1년 동안 상석을 올리고 새벽4시에 일어나 천수경을 읊었다. 아내 세상 떠나고 번번이 아들 며느리는 집에 들어온다고 하였지만 그때 마다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다 내 나이 80이 되어 기어이 아들 며느리가 집에 들어왔다.
‘자는 잠결에 가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하는데 86세 되는 해 내가 생각해도 건강이 많이 기울어지는 것 같아 병원에 가서 검진을 하니 중병을 실었다 하였다. 자녀들은 병원에 입원하라고 법석을 떨었지만 고집을 부려 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집에서 치료하면 된다고 하고 가족들을 불러 제사를 모아 한 번에 모시라 당부하고 대소가 가족들을 불러 대소가에서 모시는 제사도 모아 모시도록 하고 외조부모님 산소는 파묘를 해 화장을 하라고 당부했다.
스님들이 세상 떠날 때 준비하는 모든 의식을 갖추고 마지막 가는 길이란 시를 쓰고 정신이 초월 같았음에도 자녀들에게는 의식을 잃은 것처럼 누워 물도 한 모금 밥 한 톨 넘기지 않고 반듯하게 누워 있으니 자식들은 물 한 모금이라도 먹이려고 갖은 애를 태웠지만 한 모습 넘기지 않고 보름쯤 있다 세상을 떠났다.



■약력 시인 박극수(현)
웅상지 편집위원장
전 웅상농협 조합장
웅상주부합창 단장
천성산문학회 회장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5년 05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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