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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상의 역사를 말하다(5)<이재학(李在鶴)>

중공군에 포로가 되어 53년 동안
북한 억류 생활을 하다 탈북한 이재학(李在鶴)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5년 02월 22일
↑↑ 당시 이재학 옹(가운데)이 아들인 이부건 시의원(왼쪽)의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서고 있다.
ⓒ 웅상뉴스
이재학옹은 1924년 웅상면 주남리 950번지에서 태어나 웅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족과 더불어 소듬(현,주남교회근처)으로 옮겨 살다 1946년 친정이 명곡인 달성 서씨댁 규수와 결혼하여 1948년 전,양산시의회 부의장 현, 웅상발전협회 회장 ‘웅상의 발자취’ 편찬위원장인 이부건을 낳고 1950년 12월 5일 육군에 입대하여 7사단 수색중대원으로 6,25 동란에 참전해 불과 얼마 되지 않은 12월 25일경 평남 덕천에서 중공군에 포로가 되어 북한에서 53년간 억류생활을 했다. 육군에서는 1950년 12월 5일 입대하는 당일 전사처리가 되어 병적을 관리해 왔고 집에서는 전사한 줄 알고 제사를 계속 지내왔다. 2003년 8월 1일부로 대한민국에 귀환하여 국방부장관 승인에 의하여 육군 7사단 하사로 전역 신고를 하고 2003년 10월 6일 고향 주남으로 귀향했다. 세계 어느 민족에게도 이런 일이 있기 어려운 일이다. 개인의 실수도 아니고 왜 우리 민족에게 이런 비극이 있었던가. 남북한 모든 국민이 전쟁을 원한 국민은 없다. 우리 국민의 의지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처절한 6,25동란이 발발되어 그 피해만 우리가 당하게 되었다. 당시 병적처리된 과정을 보면 치열한 전쟁이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입대한지 20일경에 포로가 되었는데 당시 전시가 얼마나 화급 했는지 군입대자를 군사 훈련도 없이 총 쏘는 요령도 바르게 훈련하지 않고 전선에 투입시켰다고 한다.
 
↑↑ 당시 신희섭 시장권한대행이 8일 이재학 옹에게 귀한 축하 꽃다발을 전달하고 있다.
ⓒ 웅상뉴스 
1950년 6월 25일 동란이 발발하고 한달도 못되어 남한국토 절반이 북한군이 점령해 국군과 맥아더장군이 총사령관으로 취임한 유엔군 측은 낙동강 전선에서 대치하고 1950년 9월 15일 아먼드소장이 지휘하는 미제10군단이 주축을 이루고 국군 해병대가 지원하여 2시간만에 인천에 상륙, 다음날 인천을 장악하고 28일에는 서울을 탈환하고 계속 북으로 진격했다.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했던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1월 중국이 6,25동란에 참전하여 20만 대군으로 남진해오자 서부전선에서는 임진강까지 밀리고 동부전선에서는 원산 흥남까지 밀려 12월 24일에는 흥남 철수를 단행했다. 1951년 1월초에 서울 인근까지 공격해 왔고 국군과 유엔군은 이를 막아내기 어려워 미8군사령관 리지웨이중장은 주력전투부대를 작전상 철수를 지시했고 한국정부도 부산으로 철수했다. 1951년 1월 4일 북한군과 중공군은 서울을 다시 점령했다. 이때 수많은 민간인과 월남민도 피난길에 올랐다. 이 후퇴가 1.4후퇴이다. 6,25동란의 전쟁 상황이 이런 시기인 1950년 12월 5일 입대 하였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극도로 불리한 때였다. 병적처리 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소대 중대 대대간에도 교전 상태를 연락할 수 없을 정도로 전쟁은 치열했고 삼국시대 활과 칼로 전쟁을 했던 모습과 흡사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소총으로 바로 눈앞에서 빗발치는 총격을 가하고 포탄을 피하기 위하여 참호 속에 뛰어들면 남북한군 유엔군 중공군이 한 참호 속에 뒤엉기는 일도 있었다 한다. 이런 상황에서 격투전도 이루어지고 수많은 병사들이 죽고 포로가 되었다 한다. 전세가 이렇다 보니 군수물자가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온 산천은 눈밭으로 뒤 덮여 있고 살을 깎아 내는 추위와 배고픔은 살아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존감마저 잃어버리게 하고 차라리 총탄에 맞아 죽는 편이 나을 것이고 포탄에 맞아 팔다리가 날아가 후송이라도 되는 것이 요행이라는 생각 뿐 이였다고 한다. 당시는 계속 후퇴를 계속하는 판국이라 날마다 북에서 남으로 향하는 것 같기는 한 데 당도한 지점이 어디인지 알 수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한다. 그 당시에는 지역 표지석을 세운 곳도 없고, 온산과 들이 눈으로 덮여 있어 알 수도 없었다. 밤낮으로 눈길을 걸어서 전 병사들이 동상에 걸려 발은 퉁퉁 붓고 아프고 저리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였다. 어떠한 경우에도 전쟁은 없어야 한다고 계속 반복하였다. 잠깐 쉰다는 것이 눈밭에서 앉아 쉬고 배고픔 보다 잠을 자지 않는 것이 더 고통이었다고 했다. 앉기만 하면 졸음이 왔고 걸어 면서도 눈을 감고 걸었다 한다. 전후방도 없고 온 국토가 전 전체가 전선이 되었다고 했다. 후퇴를 하는 곳마다 북한군과 중공군이 가 있어 그들이 언제 나타날지도 몰라 부대 집단으로 이동하는 것마저 포기하고 소대별로 이동하여야 했다. 소대로 이동하다 우리 소대는 중공군에게 포위가 되어 전부 포로 신세가 된 것이다. 포로 생활의 비참함은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당시 중공군은 전쟁에 참전하면서도 소총마저 지급 받지 못한 병사도 있었던 중공군, 그들도 굶기를 예사로 하는 군대가 포로에게는 어떻게 취급했겠는가는 실상이 어느 정도 인지 상상될 것이다. 포로가 되어 있으면서도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기대는 늘 마음속에 떠나지 않았다. 북한군과 중공군은 공군포격기로 폭격을 가하는 유엔군전력에 감당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고 결국 휴전 상태가 되었다. 포로수용소에서 아오지탄광으로 인간의 한계를 느끼는 최악의 상태를 비교한다면 캄보디아 대학살장과 다름없는 현장이 적절한 표현이 될 것 같다. 이 어려운 고비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고향 돌아갈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곧 남북통일이 되겠지 하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통일은 점차 멀어지면서 남북한이 대치되는 상황에 돌입되자 남한에 사는 부모 형제 아내 아들에게 영원히 연락할 수 없는 절망적 처지가 되고 말았다. 오직 소망이 있다면 내 살아생전에 부모 형제 아내 아들 얼굴한번 보는 것뿐이었다. 생명을 부지해야한다는 목적과 소망이 있기에 생겨난 것이다. 나의 의지로 살아 갈 수도 없는 게 북한체제 이곳저곳 끌러 다니다 이북에서 남한이 가까운 황해도 용연군에 살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이곳에 살다보니 이웃들과 협업농장에서 일을 같이 하게 되고 자연 어울릴 수밖에 없어 그분들의 사는 모습도 알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혁명주체사상이라 하며 이해못할교육을 시켜 겉모습은 이에 복종하려는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인민들의 가슴에는 전통도 살아 숨 쉬고 인정도 살아있었다. 모심기 노래도 많이 배우고 각가지 소리도 많이 듣다 보니 따라 할 수 있게 되었다.
모심기 노래 중 한가락을 소개하면
모야 모야 노랑 모야 언제 커서 열매 열래
환미 내라 색조 내라 달려 들제 열매 열지
에헤라 상사디야
노래 가사에 보면 봉건 사회 때 춘궁기에 배고픈 백성이 관아로부터 빌려 먹은 곡식을 추수해 갚는 환미와 나라에 무는 세금으로 물리는 곡식이나 꾸어먹은 양곡을 덧 붙여 갚는 색조를 물고 나면 열매를 맺어도 남는 것이 없는 서글픈 한을 노래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은 옛날 어린시절 살아온 고향 분들의 모습 같아 고향을 그리며 이 노래를 즐겨 불렀다 한다.
쾌지나 칭칭 를 하는 구절도 ‘옹헤야와 상사디야’를 하는 구절에도 남북한 동포의 한이 같고 우리는 한민족이 확실하다는 마음을 갖게 했다. 대한민국 국민 중에 나만큼 통일을 열망한 사람도 잘 없을 것이라 했다. 이북에서 배고프지 않았나 하는 질문을 남한에서 많이 들었다.
김일성 체제하에서는 식량배급으로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김정일 체제하에서는 나날이 식량배급량이 줄어갔다. 탈북 할 시기에도 식량문제가 날로 어려워져 갔다. 북한에서 홀로 살면서 남한에 있는 가족을 만나야 한다는 일념을 계속했지만 북한의 체제여건상 가정꾸리는 일도 혼자 뜻으로 결정할 수 없는 일이라 어쩔 수 없이 그곳에서 가정을 이루어 보게 되었다. 그러나 항시 이북가족들에게도 우리가족의 고향은 경남 양산군 주남리라는 사실을 상기 시켰다.
식량과 생활용품을 구하기가 어려워 중국으로 밀무역을 하는 사람을 통해 중국 소식을 접하게 되고 남한소식도 접하게 되어 이북에서 난 딸이 2001년 4월 흥룡강성으로 탈북에 성공했다.
↑↑ 국군포로 귀환 사실 확인서’가 당시 역사를 실감케 한다.
ⓒ 웅상뉴스
탈북자들의 과정을 각종 언론매체를 통해 나온 보도가 거짓이 아닌 진실이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2002년 8월 북한에서 난 딸 이모씨는 중국에서 남한에서 난 아들 부건과 만나 아버지를 남한으로 모실 계획을 세우고 2002년 8월 아버지를 황해도 용연군 용연읍에서 흥룡강성으로 탈북 성공시켜 2003년 7월 흥룡강성에서 약 8일만에 2002년 8월 베이징 한국대사관에 도착했다. 약 2개월간 정부기관 상담 및 조사완료 후 국군포로로 확정 국방장관 승인 후 육군 7사단에서 하사로 전역신고 하고 2003년 6월 주남 고향에 도착했다. 전역식때는 양산재향군인회에서 버스를 전세 내어 가족들과 6.25 참전용사회 양산지회 이삼걸 회장, 양산시 재향 군인회장 주철주와 필자 등 여러명이 참석했다. 탈북하는 과정에 아들 이부건의 각고한 노력이 없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종제 재근이가 중앙정보부 현역 군인으로서는 최고 계급자로 있었던 경력이 있어 이도 도움이 되었다. 탈북 길을 안내해준 분들에게도 감사드리고 환대해 주는 고향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고, 오근섭양산시장도 많은 시민을 모아 문화회관에서 환영회를 베풀어 주었다.
이글은 육군본부의 병적기록부와 이재학옹이 귀향하여 생활할 때 필자와 평소 나눈 이야기와 같은 마을에서 자란 이재학 옹 보다 몇 살 아래인 6.25참전용사회 양산지회장 이삼걸 증언을 토대하여 적은 글이다.
↑↑ ■약력 시인 박극수 (현)웅상지 편집위원장 전 웅상농협 조합장 웅상주부합창 단장 천성산문학회 회장
ⓒ 웅상뉴스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5년 0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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