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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상의 역사를 말하다(2)/웅상에서 가장 오래 거주한 집과 그 문중

박병기 가(家), 양산시 용당리 207번지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4년 11월 25일
↑↑ 양산시 용당동 207번지 옛 박병기 가(家) 옛 터에 유치원과 배밭이 들어서 있다
ⓒ 웅상뉴스
양산시 웅상읍 용당리 207번지에서 14대째 거주한 박병기는 고려개국공신 장무공 박윤웅의 35대손이며 충청감사를 역임한 사은공 박추(朴諏)의 20대손이다.

임진왜란 시 의병장으로 출병하여 울산 경주 일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울산 선무원종공신으로 수훈된 경은(慶殷 1566년 1월 29일생 1641년 11월 15일 졸)의 14대손이며 팔도병사를 역임한 이명(而眳 1615년 8월 13일 ~1676년 11월 4일)의 13대손이다.

임란 공신 14대조 경은이 용당에 정착한 것은 확실하나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지만 1570년~ 1600년경에 용당리 207번지일대에서 1983년까지 14대째 400여 년 동안 줄곧 거주한 것만은 틀림없다.

기록된 문헌을 실기하여 주택규모와 형태는 구전이나 집터흔적으로 추정하고 문중일원의 모습을 소개한다.

전설에 의하면 웅촌면 방계에 통도사보다 더 큰 규모의 사찰이었던 운흥사가 망하고 그 정기가 용당리 207번지 일대로 이동하여 오랜 세월동안 세도를 누릴 수 있었다한다.

옛날 주택입구 대문에서 안채까지 들어서러면 12대문을 거쳐야했고 입구 대문의 위치는 한창제지 공장과 솔베기 근처였을 것이라고 한다.
주택규모도 엄청 큰 규모였을 것이고 대지면적도 몇 만평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많은 하인을 거느리고 유교문화 세도가들의 모습으로 살았을 것이다.

주택 담장이 어떤 경위에서 좁아졌는지 알 수 없지만 1930년경까지만 해도 용당 당산나무로 모시는 은행나무 근처까지 삼대문이 있었고 그곳 사랑채에 병기 할아버지 주희(注禧 1900년 2월 28일~1944년 8월 17일)께서 거처하였으며 형태가 ㄷ자 형태의 목조 기왓집이었다. 1960년경 사랑채와 일부는 화재로 소실되었다.

가세가 기울어 1983년경까지 남아있는 집과 집터를 병기가 매도할시 대지 1000여 평과 연못이 80평 정도였다. 지금은 옛집형태는 없어지고 그 자리에 제조공장이 들어서있다.(현 연지어린이집 뒤)

중시조 장무공 박윤웅은 웅상을 포함한 울산지역의 호족장으로 고려를 개국하는데 공을 세운 공로로 개국공신 장무공을 제수 받았다.

흥려부를 통치하는 통치권을 받아 식읍으로 제수 받은 많은 전답을 국가와 백성들에게 귀속하고 강동 정자앞 바다에 있는 미역을 생산하는 곽암이라는 바닷속의 바위만 남겨 지금까지 1000년이 넘는 세월을 흥려박씨 문중에서 미역생산 및 채취권을 소유하고 있다.

이성계는 정권을 찬탈하고 고려국 충청감사로 재임했던 박추(朴諏)에게 더 높은 관직을 제수할 것이니 이성계 정권에 협조할 것을 회유하였지만 박추는 단호하게 거부하고 태학생 72현들과 뜻을 같이하여 벼슬을 버리고 향리 울산으로 낙향하여 움막을 짓고 나라 잃은 죄인이 하늘보기 부끄럽다며 늘 상 삿갓을 쓰고 북쪽으로 향해 앉지도 않고 고려에서 생산한 곡식을 갈아 죽을 쑤어 먹으며 연명하다 고려곡식이 다하자 세상을 하직하였다.

후세들도 사은공의 뜻을 받들어 벼슬길에 나아가는 일을 삼가고 생업과 학문에만 매진하다 임진왜란으로 나라사정이 풍전등화가 되어 임금도 궁궐 밖으로 피신을 하고 지역 수령들마저 백성을 버리고 자기생명만 지키겠다고 도망을 가는 서글픈 처지의 나라사정에 핍박받고 살아온 백성들은 분개 의분하여 구국일념으로 의병장이 되고 의병이 되어 생명을 걸고 백성과 나라를 지켰다.

울산지역에서도 선무원종 공신록에 기록된 공신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박추의 후손들은 어느 문중보다 수적으로도 공과도 자랑할 만하다.
위의 기록된 분들 간의 촌수는 다 유복지친간이며 다른 문중에서 봉기하여 의병장이 되어 장열하게 싸워 선무원종 공신으로 수훈된 불들 중에는 인척들이 많다.

공신으로 수훈된 분들의 휘하에는 공신으로 수훈되지 못한 많은 분들이 병사가 있었다. 이분들도 공신 못지않은 구국일념을 가지고 생업과 가족을 버리고 의병이 되어 격전지로 나아갔다. 병사들 중에는 의병장들의 친척들이 가장 많았을 것이다.

문중과 인척중에는 젊고 혈기있는 분들은 모두 목숨 걸고 나라를 위해 싸웠다는 것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하나같이 단결하여 봉기한 문중이다.

용당에 정학한 경은의 아들 이명(而眳)은 태어날 때부터 체구가 장대하고 어린시절부터 힘이 장사였고 비범했다한다.

어린시절 학당은 우불산성 안에 있는 서당이었다. 수업에 임하는 자세도 모범학동이었고 아무리 세찬 태풍이 불고 홍수가 나 회야강 물이 범람하여 강 건너기 어려워도 서당을 빠지는 날이 없었고 같이 공부하는 학동들의 강 건거는 일도 도맡아 도와주었다고 한다.

힘없는 나라는 백성을 지켜줄 수 없다. 힘 있는 나라는 국방이 튼튼한 나라다. 힘 있는 나라로 만드는 주축이 되어야지 하는 꿈을 가지고 1644년 29세 되던 해 무과에 급제하여 거창 보성 강계 길주 회령등지의 지역에서 부사를 역임하고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병사훈련도청 팔도의 병마절도사를 두루 거치고 팔도병사로 팔도의 병사권을 통솔하였다.

관직에 임한 업적에 관하여는 문헌이 남지 않아 기록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경은의 13대 종손 동식(東植)이 여러 권의 서책을 보관하다 영남대학의 모교수가 복사하고 돌려주겠다하여 빌려간 서책을 돌려받지 못했다.

동식(東植 1933. 12. 13 ~ 1982. 10. 29)은 13대 종가댁의 종손이다. 가세가 기울어 경제적으로 어려운 지경에도 지역 내 길흉사에 빠지는 일도 없었고 명문지가의 종손다운 모습을 세상을 하직하는 순간까지 지켰다.

아내 청안이씨 복규(福閨)역시 13대 종부다운 고루한 모습을 지키며 생활하고 있다. 슬하에 14대 종손 병기(炳玘)와 병완(炳捖) 병용(炳龍) 병록(炳鹿) 병재(炳哉)형제가 다 가정을 이루어 열심히 다복한 가정을 가꾸며 생업 따라 각 지역에서 생활하고 있다.
↑↑ ■약력
시인 박극수
(현)웅상지 편집위원장
전 웅상농협 조합장
웅상주부합창 단장
천성산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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