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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상의 역사를 말하다/웅상 행정권역의 흐름

박극수, (현)웅상지 편집위원장
전 웅상농협 조합장
웅상주부합창 단장
천성산문학회 회장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4년 10월 10일
ⓒ 웅상뉴스
고대 문명의 발상지도 그렇고 우리나라 어느 지역이고 지역이 형성된 곳은 강변따라 형성되었다. 강변은 지형이 완만하여 농경지를 이루기도 통행로와 수리를 이용하기도 용이하다. 자연적인 지형지물이 인적 물적 교류의 공간이 되어 삶의 터전이 되고 이 영역이 생활권이 되고 반복한 흔적이 전통 역사가 되고 지역과 나라가 되었다.

우리 선조들은 회야강을 따라 왕래하는 통로와 농경지를 이루어 지역을 형성했다.
회야강은 우리에게 생활권, 전통성, 역사성을 제공한 원천이다.

우시산국 권역도 회야강변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웅상 웅촌 청량 온양 서생도 회야강을 접해 있다. 이 권역은 인위적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린 자연적 권역이다. 국가와 지역 권역이란 개념의 경계가 생긴 후부터 1906년까지 웅상은 울산지역에 속해 있었다.

토착성씨들의 이동 경로를 보아도 경주에서 울산으로 이동하여 웅상으로 정착하게 된 경로가 대다수다. 지금에야 교통수단의 발달로 원거리 이동도 쉽게 할 수 있어 전국에 있는 성씨가 다 어울려 살고 있지만 완전 농경위주의 생활을 한 근세 1970년 전까지만 해도 지역민의 선대들은 90%이상이 경주울산지역에 깊은 연고를 가지고 있었다.

 
↑↑ 우불산성 서쪽 성곽
ⓒ 웅상뉴스 
신라 때부터 조선 말기까지 우불산신사에서 국가가 주도하여 울산수령이 제주가 되어 국가와 백성의 안위를 위한 제사를 모셨고 우시산이란 국가명이 울산이란 지역명이 되었고 고려건국으로부터 흥려부에 예속되어 조선말까지 울산지역에 속해 있었다.

임진왜란 때도 우리지역에서 봉기한 의병들이 울산군수 휘하에서 울산 경주 언양 기장 동래 병력과 협력하여 나라를 지켰다. 3.1 만세운동에 참여한 백성들도 울산, 남창, 범어사에 참여했다.

부족국가 때 영역을 넓히기 위한 전쟁도 동래쪽 국가와 경주쪽 국가와 전쟁했다. 천성산 서쪽지역과는 전쟁도 교류도 없었다.

1906년에 웅상이 양산으로 편입된 이후 1970년경까지 혈연의 관계도 없고 교육의 학군제도가 행정단위로 얽매이기 이전에는 상급학교에 진학을 해도 주로 부산 울산으로 진학하여 학연도 없었다.

1906년 우리나라 상황은 국권이 상실되고 없었던 때다. 1905년 일본의 강압에 의하여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우리나라 임금 고종황제는 이름뿐인 왕이 되어 국가를 다스릴 아무런 힘도 없고 대신들은 임금의 령에 따라 국정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령에 따라 국정이 유린되고 있었다.

경찰권 군사통치권도 상실되고 주권이 송두리째 말살된 때였다. 시국이 이런 시기에 웅상이 양산에 편입되었다. 당시 우리지역민 단 한사람의 의견도 질문한 적도 없이 일본인들의 통치수단을 위하여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행정개편을 한다는 허울을 건 기만적 행위이다.

몇 천 년 생활권 전통 역사성을 무시하고 지역민간의 이질감을 부채질하여 단결된 힘을 분열과 갈등으로 지역정서를 만들어 맹종으로 순종하는 백성을 만들기 위한 우민 정책의 일환으로 웅상이 양산과 합해진 것이다.

5일 시장을 이용해도 서창장 이외 많이 이용한 시장은 바다가 가까워 해산물이 풍부하고 동해남부선 철로가 개설되어 물류 이동이 편리한 남창장을 많이 이용하고 좌천장도 이용했다.
남창장은 3일, 8일날 열리고 좌천장은 서창장날과 동일한 4일, 9일날 열렸다. 왕래는 도보로 용당고개를 넘어 남창장으로 가고 진치재를 넘어 좌천장으로 갔다. 농우시장이 번성한 울산, 언양 시장은 농우를 구입하고 처분하기 위하여 이용하기도 했다.

남창지역 쪽에는 혈연관계가 많아 시장에 가는 목적은 필요한 물건을 구하고 팔기 위해서라기보다 장에 가면 친인척을 만나다는 설레임 때문에 먼 길을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나르면서 먼 길인 줄 모르고 왕래했다.

우리 웅상 말 중에 술에 만취된 사람을 향해 하는 말이 오늘 남창장날 되었네란 말이 있다. 이 말은 웅상에서 남창장에 가면 반가운 이들이 너무 많아 서로 상봉하여 회포를 풀며 만취가 되도록 약주를 들고 뒤뚱걸음으로 남창고개를 넘어오는 분들이 너무 많아 이를 이른 말 이다.

기장군이 1973년 양산군에 편입되었다. 1986년 기장출장소를 개소했다. 양산시에서 1994.12.31.독립하여 기장군을 찾았고 1995.3.31. 부산광역시에 통합되어 기장군으로 개편되었다. 양산시로 편입된 이후부터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이 양산시에 편입된 부당성을 내세워 계속 복군을 요청했다.

1986년 기장군 복군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본격적으로 고향군 찾기에 나섰다. 추진위원회에서 행정구역개편에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 기관이란 기관에는 건의서, 진정서, 탄원서, 청원서, 방문 등을 끊임없이 계속하여 이루어 내었다. 당시 큰 힘이 되었던 분은 서생면 위곡에서 출생한 당시 내무부장관이었던 최형우 힘이 큰 힘이 되었다.

우리 웅상읍에서도 지도자 몇 분들이 앞장서 행정구역 개편 주민여론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던바 주민 75%이상이 행정구역개편을 찬성해 행정구역개편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에 전종태를 선출하고 경상남도의회 의원 박봉수 양산시의회 의원 김진만과 협력하여 진정서를 여러 기관에 제출하고 주민 30,000여명이 날인한 청원서를 작성하여 지역출신 나오연 국회의원에게 청원해 줄 것을 요청하고 제출하였으나 국회청원여부에 관한 답변은 받지 못했다.

이와 동일한 청원서를 부산시의회에 접수하였던바 정식안건으로 상정하여 만장일치 찬성으로 결의되어 부산시에서는 인구증가 전진기지로 웅상을 활용하겠다하며 대환영을 했다.

한편으로는 박봉수 도의원과 김진만 시의원, 전종태 추진위원장과 실무자들은 내무 부장관직을 일주일 전에 사퇴하고 한나라당 대권주자로 유력하게 부상하고 있던 최형우 자택을(서울 구기동) 새벽에 방문하여 웅상읍 행정구역개편에 힘이 되어줄 것을 부탁하였던바 웅상은 내 고향이나 다를 바가 없다. 친인척도 많고 고향 서생면도 우시산국였고 회야강 줄기를 접해있는 곳이다.

시기만 적절하게 민원을 접수했다면 충분하게 고려해 볼 만한 민원이었다. 정관직에 있을 때 기장군 부산 편입 건이 국무위원회에 상정될 때 같이 되었다면 웅상주민 뜻이 이루어 질 수도 있을 것인데 기장군민들이 접수한 행정개편 민원건은 국구위원회에 결의되어 국회에서 결의하기로 여야 총무단에서 합의된 시안이라며 애석해 했다. 김대중 정권 시절 박태준 국무총리실에 방문하여 총리를 면담하여 행정구역 개편의 필요성을 건의하여 당정과 협의해 보겠다는 답변을 받고 얼마 되지 않아 총리가 교체되었다.

그 이후 웅상발전협의회 이태환 회장은 웅상행정구역개편 분석자료를 부산대학교와 울산대학교에 용역 의뢰하기로 발전협의회에서 결의하여 경비를 지출하고 주민 설문조사와 부산 울산 양산 장단기 발전계획과 지역특성과 주민생활 전반적인 부분을 연구 검토하여 제출 받은 논문의 결론은 웅상의 장기 발전과 주민들의 편의와 생활권 역사성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울산시에 편입하여 웅상과 웅촌면이 옛날처럼 한 고장이 되고 인근읍면을 합하여 독립행정체제로 나아가는 길이 가장 이상적인 지역형태라는 논문이 제출되었다.

발전협의회 이태환 회장은 이 논문에 근거하여 추진하고자 해도 현행법이 광역시와 도간에 행정통폐합이 불가하다는 조항으로 인하여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현 발전협의회장 이부근 웅상지 편집위원장 박극수, 당시 사무국장 이무환을 대동하여 입법기관인 국회의장 김형오 사무실을 방문하여 질의 건의하니 법을 개정하던가 특별조치법이라도 제정하여 광역시, 도간 통폐합 가능하도록 하여 행정구역 변경조정이 필요한 지역에는 행정구역을 조성하자는 안이 여아 합의되어 국회에서는 행정구역 개편업무를 총괄할 의원까지 선임되어 있는 상태라는 답변까지 들었음에도 여야간의 당리당략에 의하여 무산되었다.

국회가 원망스러운 순간이 참 많았지만 이때 역시 국회가 국민을 위한 국회가 아니라 국회의원 자신들을 위하고 당리당략의 싸움질 하는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평산동에 위치한 웅상출장소
ⓒ 웅상뉴스 
웅상출장소가 개소되고 그간 임차한 건물에서 업무를 보다 2014년 1월 20일 주진동에 시에서 건립한 새 건물에 입주하여 업무를 개시하고 건물 준공식을 2014년 2월 14일(정월대보름) 개최했다.

웅상출장소 개설과 4개동 분동은 주민의 바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시와 시의회의 주관과 지역지도자라 지칭하는 양지만 찾아다니는 일부 지도자들이 동조하여 출장소를 개소하게 되었다. 양산시의회의원 이부건, 박일배는 적극 반대하였다.

4개동으로 분동됨으로 인하여 농촌지역에서 받는 각종 혜택을 받지 못해 주민들에게 직간접으로 부담된 경제적 부담은 엄청 과다해졌다. 시에서 특별 배려로 웅상에 많은 예산을 할애해 주려는 노력은 하지만 주민들이 감당하는 금액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출장소 부지는 금성사료 회장 장명식과 심완조께서 기부하고 일부는 시에서 매입했다. 부지 기부 과정과 도시계획에 관련한 일은 별지에서 다루고자 한다. 그들은 출장소 건립예산 확보시에도 양산시와 시의회도 많은 노고를 했고 당시 발전협의회장 이태환, 현 발전협의회장 이부근, 사무국장 이무환, 나를 대동하여 양산출신 국회의원이며 국회의장 박희태 사무실을 방문하여 출장소 건립과 하수종말처리장 예산 확보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당시 국회의장 비서관으로 근무했던 웅상 출신 박인의 수고도 많았다.

출장소는 양산시청으로부터 이관 받아 행하는 업무도 많다. 출장소장은 인사권도 예산편성, 집행 권한도 없다. 소장이 출장소 관할 동장을 통제하기에 현 제도상의 한계가 있다.

양산시의 2014 중점 추진사업 중 가장 주된 사업은 인구 30만이 되는 일이다. 2014년 2월경 양산시 인구가 29만명이니 2014년 말 안에 30만은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현행법으로 35만 이상 인구가 되면 분구가 가능하고 30만 5천명 이상의 인구가 되면 국회의원 선거구 분구가 가능하다 어떠한 형태의 지역이 되어야 하는지 많이 고민하고 선택하여 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힘 모아 가야 할 것이다.
↑↑ 웅상시가지 전경
ⓒ 웅상뉴스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4년 10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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