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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폭력의 기원

김서련 소설가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3년 10월 22일
내 말이 들리나요?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굵고 단단한 목소리였다. 네, 들려요. 나는 깊은 숨을 내 쉬며 말했다. 분명히 말했는데, 어찌된 일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몇 번이나 입술을 꿈쩍거렸지만, 내 입은 무생물처럼 생각의 신호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방금 전, 나는 검은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꿈을 꾸고 있었다. 깊고 깊은 바닥에서 무언가가 아가리를 크게 벌이고 강한 힘으로 내 몸을 흡입하고 있는 것 같았다. 허우적거릴수록 몸은 점점 깊이 빠져 들어갔다. 질척거리는 진흙이 내 몸에 점점 두텁게 들러붙으며 압박했다. 발가락 하나 꼼짝 할 수 없을 정도로 진흙은 단단하게 내 몸을 짓눌렀다. 어디에선가 가죽 냄새가 풍겨왔다. 이러다가 죽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는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간신히 눈을 떴다. 꿈이었구나.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는데, 여전히 늪 속에서 무언가가 내 몸을 잡아당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깨어났나요? 내 말이 들리나요?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려고 했다. 분명 돌렸는데, 내 얼굴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생각들이 순식간에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증발했다. 생각뿐 아니라 눈 속으로 쏟아져 내리던 불빛과 귓바퀴에 맴돌던 목소리도 암흑 속으로 사라져가면서 나는 어둠뿐인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 빛이라곤 보이지 않는 어둔 세상이지만 무서운 생물들이 어딘가에서 숨어서 호시탐탐 날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이 내게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내 목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정신을 가다듬었다. 나는 어쩌면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몰랐다. 애써 그런 생각을 하며 거대하게 몰려오는 두려움과 공포를 밀어냈다. 나는 이 악몽에서 깨어나기 위해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분명히 움직였는데, 움직여지지 않았다. 손가락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깨어났나요?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얼굴이 눈앞에서 얼쩡거렸다. 누구지?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얼굴을 살폈다. 잘 모르는 남자였다. 턱에는 짧게 솟아난 수염이 촘촘히 박혀 있고 눈매가 날카로운 게 성깔이 꽤 있어 보였다. 깨어났나요? 내 말이 들리나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요? 남자는 연이어 물어왔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있었죠?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기억의 조각들이 뒤죽박죽 섞여서 허공에 돌아다녔다. 제자리에 꿰야 하는데, 잘 되지 않았다. 남자는 집요하게 내 눈을 들여다봤다. 그런 남자의 머리 위에서 불빛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정적이 고요하게 주변에 쌓였다. 자박자박, 발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이윽고 문이 열리더니 여러 발소리가 내 주위를 둘러쌌다. 내 말이 들리나요? 검은 테 안경을 쓰고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내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네. 들려요. 나는 또렷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말은 여전히 입 밖으로 나오지 않고 머릿속에서만 맴돌았다.
어떻게 된 거예요? 의식이 돌아온 건가요?
굵은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검은 테 안경의 남자가 말했다. 이게 무슨 말들이야. 그러니까…. 나는 사고나 병으로 식물인간이 된 사람들을 떠올렸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정리하자면 굵은 목소리는 내 사건을 담당한 형사이고 검은 테 안경은 내 치료를 담당한 의사였다. 내가 의식불명이 된 것은 십여 일 전이었고 그동안 형사는 매일 병실로 날 찾아왔다는 거였다.
의사가 나가자 주위는 다시 고요해졌다. 남자, 아니 형사는 뚫어지라고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내 눈을 통해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고 싶다는 듯이. 그의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은 엉망이었다. 눈두덩과 뺨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 있고 콧대는 내려앉아 있고 입술 끝은 약간 찢어져 있었다. 김무산 씨는 정당방위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그가 물었다. 아, 나는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물론 머릿속에만 이루어진 행동이었다. 정당방위라니. 속에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기운이 치밀어 올랐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조사를 해 보면 알 수 있겠지만…어떻게 된 겁니까? 분명히 뭔가가 있다고 확신하는 듯 덧붙여 말하는 그의 목소리엔 의문이 담겨 있었다. 그제야 어렴풋이 기억들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나는 내성적이고 유순한 아이였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욱더 순해졌고 내 안으로만 파고들었다. 딱히 그럴 만한 까닭이 생각나지 않지만 그 당시 내가 쓴 일기장에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실제로 아버지를 증오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몇 가지 생각나는 일은 이런 것들이었다. 한밤중 누군가와 싸워서 죽이겠다고 낫을 들고 쫓아다니던 아버지를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 구경하던 일, 어쩌다가 가끔 집에 들어오는 아버지의 실핏줄이 터진 것처럼 벌겋게 충혈된 눈, 서로 욕설을 퍼부으며 아버지와 뒤엉켜 싸우던 엄마의 독기가 뿜어져 나오던 눈, 그리고 또… 기억나는 건 아버지가 내게 한 번도 다정하게 말을 건 적이 없다는 거였다. 사실 유년기 때 정도는 다르지만 누구나 외상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 테고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서울로 대학 진학을 했고 집에는 거의 내려가지 않았다. 따라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도 잊어갔다. 하지만 내 안의 무언가가 폭력성을 갈구하고 있는 것일까. 서너 번 연애 끝에 선택한 남편은 하필이면 아버지와 비슷한 유전자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회사 입사 동기였는데, 우리는 아무도 모르게 연애를 했고 결혼 날짜를 잡던 중 그에게 첫 번째 폭행을 당했다. 이유는 단순히 그가 싫어하는 동료들과 함께 술집에 가서 어울려 놀았다는 거였다. 무슨 말 끝에 갑자기 격앙하면서 폭행을 가하는 그의 행동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지만 이미 청첩장도 돌리고 식장도 계약을 해 놓은 터라 깊이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런데 그는 신혼 여행지에서 또 다시 폭력을 휘둘렀다. 첫날밤을 지나고 그 다음 날, 말을 타러 가던 중이었다. 그는 철조망을 넘다가 발을 잘못 헛디뎌 넘어졌고 바지 끝이 삐쭉 튀어나온 철사에 걸려 찌익 찢어졌다. 그것을 불길한 징조로 해석한 그는 그렇게 된 원인을 내게로 돌렸다. 그날 밤, 술에 취한 그는 밤새도록 고함을 지르고 폭언을 퍼부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그런 행동을 한 것에는 어쩌면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평생 돈만 쓰기만 할 줄 알았지 벌 생각이 없었던 아버지 대신 처녀 때 미용실에서 일했던 엄마는 다시 종일 서서 남의 머리를 매만졌다. 수입은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그건 우리가족이 먹고 살기에 딱 알맞았다. 그런 우리 집 사정을 알게 된 그는 최대한 간소하게 식을 치르자고 말했고 그렇게 했다. 하지만 내심 불만이 많았던 것일까. 아니면 저울질을 한 것일까. 아니면 … 한 번 남편의 본심을 의심하자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남편과 이혼을 감행했고 가볍게 스치듯 남자들을 만났다.
그러다가 김무산, 그를 만났다.
나는 생계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했다. 처음엔 가게나 해볼까 싶어 이리저리 알아봤다. 갈수록 경기가 안 좋아지고 있어 장사하는 사람들은 울상을 짓고 있었다. 개업하자마자 몇 개월 만에 그만 두거나 다른 업종으로 변경하는 가게도 꽤 많았다. 괜찮다 싶은 업종은 목돈을 밀어 넣어야 했다. 장사는 일단 접고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지인의 소개로 정보신문사에서 텔레마케터로 일을 하게 됐다. 벼룩시장, 교차로 등 다른 정보신문들을 참고로 업체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광고를 권하는 일이었다. 종일 전화를 거는 일은 힘들었지만 영업은 생각한 것과 달리 재미도 있었다. 그렇게 재미를 붙이는 데는 광고 부장인 그의 도움이 컸다. 사업 부도를 내고 오랜 지인인 사장 밑에서 광고 일을 하고 있던 그는 젊었을 때부터 영업을 몸에 익힌 터라 나름대로 노하우가 있었다. 그는 틈만 나면 내게 강의를 했다. 그에게 영업을 배우면서 어쩌면 외로울 수 있는 시간들을 그럭저럭 잘 보냈다. 그와 연인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예 형사는 침대 위로 올라와서 내 몸을 올라탔다. 그리고 자신의 눈을 바싹 내 눈에다 갖다 댔다. 그의 눈동자에 내 모습이 또렷하게 박혀 있다. 마치 내 눈을 투시해 머릿속의 생각을 들여다보고 싶은 듯 그의 눈길은 강하고 집요했다. 얼마나 정적이 흘렀을까.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내 눈을 들여다보던 그가 마침내 긴 한숨을 내 쉬더니 침대에서 내려갔다. 그가 사라지자 천장에 매달려 있던 전등의 불빛이 다시 내 눈으로 쏟아졌다. 조금 전 형사의 무례한 행동을 씻어내려는 듯 부드럽게 내 몸을 감싸고 흘렀다. 형사는 무슨 생각에 잠긴 눈빛으로 날 바라보더니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거친 욕설을 퍼부어대기도 하고 꽥,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목소리의 톤을 낮춰서 소곤거리기도 했다. 전화를 끝낸 그가 내게 말했다.
경찰이 사건 현장에 도착했을 때 김무산 씨는 멍하니 허공만 보고 있더군요. 당신은 화단 근처에 쓰러져 있고요. 그는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어요. 당신이 먼저 시비를 걸어 싸움이 시작되었다고요. 그래서 화가 나서 몇 차례 때리긴 했지만 곧 그만두려고 했는데, 당신이 무슨 귀신에 씌인 것처럼 칼을 들고 죽이겠다고 악착같이 덤벼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칼을 뺏으려고 몸싸움을 벌이던 도중 당신이 화단에 삐죽삐죽 하게 쌓아놓은 벽돌 모서리에 그만 머리를 부딪쳤다고 하더군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요? 지난 일주일 동안 텔레비전과 신문 등 매체란 매체는 당신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무실이고 술집이고 어디든 사람들은 모였다 하면 당신들 얘기를 떠들어댑니다. 김무산 씨의 말이 사실입니까? 나는 공기 속으로 퍼져 나가는 형사의 말을 좇았다. 드문드문 끊어지기도 하고 들려오기도 했다. 그리고 조사한 바에 의하면 김무산 씨는 여자관계도 꽤 복잡하더군요. 이혼하고 난 뒤 두 번 동거를 했고 애인은 늘 있었고요. 차는 전 애인의 명의로 되어 있고요. 매달 양육비를 보내 줘야 할 노모와 아이도 있더군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대체 왜 그러시는 거예요. 아무 말도 못하는 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나는 머릿속으로 중얼거렸다. 현장에 도착 했을 때 찍은 사진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납니까? 형사가 불쑥 사진을 내 눈에 들이밀었다. 피투성이가 된 내 얼굴이었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돌려지지 않았다. 꼼짝없이 사진을 바라봐야만 했다. 기이하게도 얼굴이 평온해 보였다. 엉뚱한 상상일까. 돌이켜보면 지난 몇 년간 편안하게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다. 더 이상 살아가려고 악착같이 굴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의 목을 사납게 물어뜯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그나저나 나는 어떻게 된 것일까. 의사의 말대로라면 혼수상태일 텐데, 이렇게 말짱하게 생각할 수 있다니. 몸은 사물처럼 굳어 있고 의식만 깨어난 것일까. 그럴 수도 있는 것일까. 나는 머릿속에다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적어보았다. 나는 살고 있는 것일까. 죽은 것일까. 혼란스러웠다. 이런 식의 삶은 여태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칼 말입니다. 당신 지문이 찍혀 있더군요. 정말로 김무산 씨를 죽이려고 했나요?
형사가 물었다.
아뇨. 난 그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칼로 사람을 찌르는 그런 인간이 아닙니다. 게다가 어떻게 내가 남자를 죽여요? 나는 약자입니다. 그리고 유순한 사람입니다. 상대가 아무리 잘못된 행동을 해도 대놓고 비난한 적이 없습니다. 늘 상대의 좋은 점만 바라보려고 애썼죠. 그런 내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나는 또박또박 말했다. 물론 형사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는 끊임없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내가 깨어났는지 묻고 날 취조한다. 참으로 답답한 인간이다. 딱 보기에도 사건의 전말이 뻔하지 않은가. 나는 그에게 폭행을 당했다. 그리고 현재 병원 침대에 누워 있다.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것만으로 그의 죄가 충분히 입증되지 않은가. 대체 뭐가 더 필요하단 말인가. 뭘 망설이는가. 우리나라 법이 이렇게 허술하단 말인가. 형사는 집요하게 계속 말했다. 그가 한 말들을 대충 요약해보면 이렇다. 119에 신고를 한 사람은 텃밭에서 가꾼 야채를 좀 나눠 주기 위해 방문한 이웃집 여자였다. 여자는 집 근처 텃밭에서 고추와 상추, 부추, 토마토 등을 가꾸었는데, 수확을 할 때마다 우리 집에 갖다 주곤 했다. 그날도 무럭무럭 자란 고추를 평소보다 많이 딴 것에 기분이 들뜬 그녀는 나를 만나 수다나 떨려고 했었는데, 그만 참혹한 광경을 보고 만 것이었다. 마치 거대한 쓰나미가 한바탕 집안을 휩쓸고 간 것 같았어요. 여자는 망연자실하게 그 말만 몇 번이나 되풀이 했다. 신고를 받고 도착한 구조대원과 경찰도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똑같이 입을 모았다. 여태 싸운 장면을 많이 봐 왔지만 그렇게 처절하게 싸운 현장은 처음이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 사람들은 별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했다. 남편과 이혼한 뒤 나는 화단이 있는 주택에다 세를 얻었다. 아파트보다 전세가격이 낮아 돈을 굳히려는 계산도 있었지만 땅이 그립고 화단이 그리웠다. 그래서 이사한 뒤 제일 먼저 한 일은 마당 한쪽에다 화단을 만든 것이었다. 어릴 때 엄마는 마당에다 화단을 만들어 갖가지 꽃들을 심었다. 나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봉숭아, 다알리아, 아네모네, 맨드라미 등을 심었다. 아무튼 형사가 주변에 살고 잇는 사람들을 일일이 탐문하고 조사했지만 그날 밤, 우리 집에서 일어난 일을 아무도 알지 못했고 아무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모두들 한밤중 비밀리에 모여 의논이라도 한 듯 말했다.

나는 침대에 딱 들러붙어 사물이 된 듯 꼼짝할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흰빛으로 일렁이는, 천장에서 쏟아져 내리는 불빛은 내게 참을 수 없는 슬픔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공기 속에서 떠다니는 빛들이 서서히 밀도를 높이더니 강한 빛줄기가 되어 내 눈을 찔렀다. 눈에 와 닿는 빛살은 날카롭고 차가웠다. 음습하고도 살기가 어려 있었다. 그것이 내 심장을 베는 것 같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그냥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뭔가 잘못된 부분이 있었다. 그게 무엇일까.
어떻게 하다 보니 그와 함께 살게 되었다. 데이트 비용도 아낄 겸 우리 집에서 자주 술을 마셨고 새벽에 그의 집으로 돌아가니 자고 간 적이 많았는데,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눌러앉게 되었다. 부도내기 전 꼬불쳐 놓은 천만 원으로 전세금을 걸고 달세 삼십 만 원짜리 방을 얻어 살고 있던 그는 돈이 아깝다면서 아예 방을 빼버렸다. 살아온 방식이 달랐던 두 사람이 함께 산다는 게 그리 쉽지 않다는 걸 이미 경험을 했건만, 나는 그를 밀어내지 못하고 내버려 두었다. 억지로 물줄기를 돌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평소에는 자상하게 이것저것 챙겨주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알코올이 그의 몸을 지배하면 상황이 달라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사나운 본성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한마디로 황량한 들판을 헤매는 들개처럼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물론 거기에 비례해서 내 의심도 점점 살이 붙었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들었다. 전남편의 자리를 그가 대신 한 것일까. 그러나 전남편에게 없는 다정함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퇴근하면서 나는 마트에서 손질한 장어구이를 샀다. 오십만 원짜리 광고도 한 건 하고 해서 오래간만에 그와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얼마 전 그가 아침을 먹다가 말고 툭 던진 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한 번 해보는 소리이거니 했다. 말하자면 돈도 되지 않는 일을 그만 두고 밀면집을 차리자는 거였다. 그러면 자신은 유명한 밀면집의 주방장한테서 육수 만드는 법을 배우고 오겠다는 거였다. 즉 주방일은 자신이 맡고 나는 홀에서 손님 접대하고 카운터만 보면 된다고 하지만 어찌 일이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될까. 주방의 설거지는 누가 할 것이며 청소는 누가 할 것이냐. 그렇게 힘든 일은 하지 못한다고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순간 그는 수저를 탁 놓더니 벌떡 일어나 휑하니 밖으로 나갔다. 종일 전화통을 붙잡고 있느라 진이 다 빠진 나는 피곤하고 지친 몸을 위로도 할 겸 소주도 서너 병 샀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가 현관문을 열어주며 무거운 짐을 들어주었다. 불판을 꺼내 식탁 위에 놓고 장어를 굽기 시작했다. 우리는 노릿노릿하게 잘 익은 장어를 안주로 소주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집안은 음식 냄새로 가득 차고 술이 들어간 그의 얼굴은 어렸을 때 본 맨드라미처럼 붉어졌다.
이백 만원만 빌려 줘.
문득 생각난 듯이, 그가 장어를 젓가락으로 뒤집다가 말고 말했다. 나는 말없이 수저질만 했다. 엊그제 받은 곗돈을 떠올렸다. 지인들과 목돈을 마련하기 위해 계를 했고 내 차례가 돌아왔던 것이다. 그걸 두고 하는 말인가.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평소에는 매력으로 느껴졌던 그의 강렬한 눈빛이 나에게 견딜 수 없는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불판에서 지글지글 익어가고 있는 장어의 몸이 서서히 흔적도 사라지더니 시큼한 냄새가 풍겨 왔다. 그것은 변기에 토해 놓은 오물에 썩어가는 음식을 섞은 냄새였다.
어딜 쓰려구?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내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좀 쓸 데가 있어.
내 눈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강렬했다. 그동안 뜸을 들이다가 기회를 봐서 간신히 꺼낸 말임을 알 수 있었다. 전에도 그랬다. 카드대금 결제를 앞둔 어느 날, 그는 종일 내가 하자는 대로 하면서 친절하게 굴었다. 처음엔 몰랐는데, 나중에야 그가 어떤 방식으로 내게 돈 얘기를 꺼낼까 내내 머리를 굴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일부러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딴청을 부렸다. 그러다가 여동생에게 다급한 일이 생겨 급히 가게 되었다. 그의 어려운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 나는 내내 마음이 짠했다. 먼저 말을 꺼내 그의 곤란함을 해결해 주지 못한 내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나는 정말이지 그와 이해관계로 얽히고 싶지 않았다. 돈으로 엮이는 순간 상황이 달라질 게 뻔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장어 살점을 양념장에 찍어 먹었다. 이미 돈을 주기로 마음을 굳히는데도, 이상하게도 순순하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침울한 얼굴빛으로 허공에다 시선을 던졌고 나는 눈을 착 아래로 깔고 묵묵히 술만 마셨다. 무거운 침묵이 주위에 감돌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만 두자. 그가 불쑥 말을 꺼냈다. 순간 가슴이 철거덕 내려앉았다. 마침내 올 것이 온 것일까. 그만 두자니 뭘? 나는 고개를 천천히 들고 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침묵을 지키던 그는 넌 너무 인간미가 없어, 라고 말을 잘근잘근 씹어내듯이 내뱉었다. 내가 인간미가 없다고? 그러는 넌 인간미가 있고? 나는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불판 위의 장어를 젓가락으로 뒤집고 또 뒤집었다. 정말 그만두고 싶어? 나는 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응.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가 대답했다. 냉정한 목소리였다. 그럼, 왜 진즉 말하지 않았어? 나는 그를 노려봤다. 그건…. 그가 무슨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나는 묵묵히 소주를 입안에 붓다시피 마셨다. 혓바닥에 착착 감기는 소주는 달짝지근했다. 많은 생각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생활비와 전기세, 수도세 등등 공동경비는 반반씩 부담하기로 했지만 그는 아직 한 번도 주지 않았다. 그리 큰 돈도 아니고 혼자 살아도 들어가는 돈이라 문제 삼지 않았다. 기본 월급에 광고 수당을 받는지라 영 수입이 없는 것도 아닌데도 툭하면 단 돈 천원도 들어있지 않는 지갑을 보여주면서 계산을 내게 미룰 때면 짜증도 나고 부담스럽기도 했다. 지갑에다 단 돈 얼마라도 채워줘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기도 했다. 근래 접어들어 그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앞일이 걱정도 되고 좀 더 똑똑하게 굴어야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그만 두자는 말을 듣자 가슴 끝자락이 말리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비열한 놈.
나도 모르게 표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얼굴색이 싸늘하게 굳어진 그가 날 노려봤다.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기에 등짝이 서늘해졌지만 나도 마치 눈싸움이라도 하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쏘아봤다. 팽팽한 기운이 둘 사이에 흘렀다. 불판의 장어가 타는 냄새가 났다. 가스레인지 불을 끄는데, 그가 갑자기 불판을 뒤엎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야? 다시 한 번 말해 봐.
그가 살기등등한 얼굴로 말했다. 아주 짧은 순간, 나는 잠깐 머뭇거렸다. 이후,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 겁이 나기도 했고 실제로 그가 비열한 행동을 했는지 안했는지도 확실치 않았다. 뚜렷하게 기억나는 게 없었다. 어쩌면 이쯤에서 그만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여태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가 이렇게 나올 때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게 관계를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더 나아가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었다. 일 초도 안 되는 시간에 많은 생각이 스쳐갔지만 나는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이미 내뱉은 말이었고 거둬들이고 싶지 않았다. 입술을 움직이려는 순간 뭔가가 마음에 걸렸지만 무시했다. 내 안에서 뭔가가 속삭였다. 갈 데까지 가보자.
넌, 정말 비열한 놈이야.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비록 그가 그런 인간이 아닐지라도 속이 후련했다. 그동안 티격태격 말다툼 할 때마다 거칠고 공격적인 그의 행동에 기가 죽어 한 번도 제대로 속엣말을 한 적이 없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가 내 얼굴로 주먹을 쭉 뻗어 날린 것은. 날 노려보는 그의 눈에서 시퍼런 살기가 흘러나왔다. 가슴 깊이 꼭꼭 가둬 놓은 증오심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듯 내 얼굴에 와 닿은 그의 주먹에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 컥, 나도 모르게 신음을 뱉어냈다. 갑작스런 충격에 몸이 휘청거렸다. 숨이 멎는 듯했다. 심장 박동수가 무섭게 빨라졌다. 통증보다 한 발짝 앞서 몰려온 것은 비참함과 수치감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대체 무슨 자격으로 이러는 거야? 네가 뭔데? 나쁜 놈. 간신히 정신을 수습한 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이 년이. 그는 이번에는 주먹이 아니라 구둣발을 마치 태권도 시합에서 발차기를 하듯 쭉 뻗었다. 직통으로 날아온 구둣발은 내 가슴에 정확하게 와 닿았다. 강한 힘에 떠밀린 나는 그대로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가슴에서 시작된 묵직한 통증이 온몸으로 퍼졌다. 머리가 하얘지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저절로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한동안 가슴을 움켜쥔 채 일어나지 못하는데, 그가 또 다시 구둣발로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맞아서 죽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사람을 어떻게 때려서 죽일 수 있는지. 어떻게 맞아서 죽을 수 있는지 잘 이해할 수 없었는데, 단번에 알았다. 그런 일이 누구에게나, 어느 날 느닷없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도. 구둣발로 팍팍 짓이긴 맥주 캔처럼 나는 바닥에 납작하게 찌그러졌다. 그만 해. 마침내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만 해. 내 목소리가 집안의 정적 속으로 울려 퍼졌다. 그는 딱 버티고 서서 날 내려다보았다. 너 같은 것 아무 것도 아냐. 그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평소에 익숙했던 집안의 사물들은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이 무덤덤하게 그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온몸의 기력이 다 빠져나갔는지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내 몸에서 뭔가가 통째로 빠져나간 것 같았다. 내 안에서 뭔가가 부서진 것 같았다. 내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나는 천장에 박혀 있는 전등을 올려다보았다. 불빛이 내 눈을 찔렀다. 냉정하고 차가웠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나를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부끄러움과 수치감, 참담함, 두려움이 내 몸을 잠식했다. 비참했다. 더 이상 비참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언젠가 본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한밤중 으슥한 골목길에서 차를 훔치던 흑인 소년은 차 안에서 도둑을 기다리고 있던 남자한테서 죽사발이 되도록 얻어맞았다. 남자는 누군가 걸려들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때마침 흑인 소년이 걸려든 것이다. 남자는 빈털터리였다. 하는 일마다 되지 않았다. 그에겐 아버지의 유산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런데 킬러에게 살해당한 아버지는 알고 보니 빚밖에 없었다. 절망에 빠진 남자는 모든 분노를 흑인 소년에게 분출했다. 흑인을 죽도록 패는 남자의 발길질에는 깊은 분노가 담겨져 있었다. 영화 속의 남자처럼 혹시 그도 자신의 분노를 내게 고스란히 분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 몸은 예전의 기억들을 되살렸다. 전남편의 발길질이 떠올랐다. 유년기 때 폭력을 당한 외상 때문에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많다고 하지만 전남편의 경우 해당되지 않았다. 시부모님은 자식들 공부시키고 아파트 사는데 한 푼이라도 보태 줄려고 아침부터 밤까지 열심히 일하는 평범하고 온화하신 분들이셨다. 나는 전남편의 폭력성이 어디에서 기인됐는지 잘 알 수 없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는 떠돌이 아이를 데려다가 양자로 삼을 정도로 인자하고 넉넉하신 분이셨다. 할머니가 지병으로 돌아가시고 할아버지는 아버지보다 서너 살 차이가 나는 스무 살짜리 처녀와 재혼했는데, 그것 때문이었을까. 잘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내 몸은 동시적으로 각각 다른 구둣발을 떠올렸다. 어디에선가 가죽 냄새가 났다. 동물의 살점에서 뜯어낸 가죽에는 시큼한 피 냄새가 났다.

종일 사람들이 들락거렸다. 내 말이 들리나요? 그들은 한결같이 내 눈을 들여다보며 내게 물어왔다. 의사도 물었고 간호사도 물었고 보험회사 직원도 물었고 엄마와 여동생도 물었고 전남편도 물었고 병문안 온 몇몇 지인들도 물었다. 그들은 내 눈을 바라보며 내가 의식이 깨어났는지 아닌지 확인했다. 어떤 이는 내가 깨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고 어떤 이는 슬픔에 못 이겨 울먹거렸고 어떤 이는 꼭 일어나라고 비통하게 중얼거렸다. 어떤 이는 자업자득이라는 식으로 날 바라봤다. 그들의 얼굴이 사라지고 나면 천장이 눈으로 들어왔다. 하얀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는 천장에는 둥근 전등이 달려 있고 흰 불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빛방울들은 끊임없이 사라지고 다시 생성되었다. 내 말이 들리나요? 갑자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왔는지 형사가 내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네. 대답 했지만 생각뿐이었다. 언제쯤 의식이 돌아올까요? 그가 누군가에게 물었다. 그건, 잘 알 수 없습니다. 의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섬뜩했다. 나는 영영 깨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였다. 이렇게 그들의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있는데, 어째서 의식이 없다고들 할까. 음악이 의식을 되살리는데 도움이 된다고 해서 다운 받아 왔어요. 들려줘도 괜찮죠? 형사가 말했다. 네. 의사가 대답하자 곧이어 음악이 들려왔다. 문득 그와 함께 노래방에 간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는 노래를 잘 불렀고 목소리도 허스키한 게 듣기 좋았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줄곧 노래를 신청했다. 어떤 날은 같은 곡을 서너 번 반복해서 부르게 한 적도 있었다. 이런 게 정말 도움이 될까요? 형사가 말했다. 나쁘지는 않아요. 음악을 통해 의식을 회복했다는 사례도 있고요. 뭐든 시도해보는 게 좋겠죠. 의사가 말했다.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휴일마다 어딜 놀러가곤 했었는데. 경주 보문사 갔을 때 풀밭에서 한숨 자고 오리배를 타던 기억도 났다. 그런 시간들이 있었다. 아무런 위험을 느끼지 않고 평화롭게 지냈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랬는데. 언제부터인가 그의 행동이 어쩐지 뭔가를 위장하기 위한 행동으로 보였다. 그와 나 사이엔 두텁고 투명한 막이 가로 놓여 있는 것 같았다. 막은 처음부터 형성되어 있었던 것인데, 내가 보지 못한 것일까. 그때서야 나는 천천히 어떤 사실을 알아갔다. 그는 내 상황에 관계없이 잘 지낼 것이다. 어쩌면 날 식물인간으로 만든 죗값을 치루지 않고 잘 살아갈지도 모른다. 어째서 그가 죗값을 치룰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는 분명히 날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바로 그때 내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또렷하게 인지했다. 그의 눈빛은 증오심과 적대감으로 번뜩였다. 수십 년 동안 찾아 헤매던 철천지원수를 만난 눈빛이었다. 깊은 정글을 헤매다가 적군을 발견한 병사의 눈빛이었다. 일말의 연민이나 동정심은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사정없이 짓밟아 죽일 수 있는 버러지였고 주인에게 달려드는 비루먹은 개새끼였다. 한 마디로 그에게 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문득 오래 전, 아버지의 멱살을 잡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랬다. 나는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 왜 그걸 잊고 있었을까.
정확하게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렴풋하게 떠오른 기억들을 종합해보면 이렇다. 그 당시 아버지는 부동산 사무실에서 노름을 했고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엄마는 새벽에 나가 밤늦게 돌아왔고 나와 동생들은 알아서 밥을 챙겨 먹어야 했다. 한번은 일주일 만에 집에 들어온 아버지가 냉장고에 든 음식을 보고 뭐 때문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버럭 역정을 냈다. 내가 뭐라고 하자 욕설을 퍼붓고 발길질을 했다. 나는 마당으로 피했고 뒤따라 나온 아버지는 구둣발을 내게 날렸다. 곧장 날아온 구둣발에 나는 땅에 쓰러졌고 아버지는 버러지처럼 나를 질끈질끈 구둣발로 짓밟았다. 견딜 수 없는 모멸감에 나는 아버지의 멱살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버지의 머리카락을 뱃속에 남아 있는 힘이란 힘은 다 끌어 모아 힘껏 잡아당겼다. 아버지가 발길질을 멈출 때까지 놓지 않았다. 그날 내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버지의 발길질을 멈추게 해야 한다는 것. 엎치락뒤치락 몸싸움을 벌이면서 바라본 하늘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노랬다.

오늘도 형사는 병실에 들렀다. 내 눈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말이 들리는지 물어보고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의식이 돌아왔는지 확인을 했다. 그리고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뭐라고? 음음… 그래, 알았어. 아직은 그대로야. 사건을 종결한다고? 글쎄… 좀 빠르지 않아? 그가 거짓말을 할 수도 있고. 주변 사람들 말로는 절대로 그런 짓을 할 여자가 아니라고 하잖아. 사람이 막판에 이르면 무슨 짓을 할 수도 있지. 하지만 이 여자는 아닌 것 같아. … 형사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래, 알았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뭐. 형사의 대답이 심드렁했다. 전화를 끊고 난 뒤 형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요. 내 말이 들리나요? 어쩌면 이 사건은 우발적인 사고로 종결될지 몰라요. 칼에서 당신 지문만 발견되었고 김무산 씨는 정당방위라고 주장하고 있어요. 자신을 죽이겠다고 칼을 휘두르는 당신을 말리려고 한 것밖에 없다고요. 그가 폭력을 휘둘러 당신이 다쳤다는 사실을 입증하려면 어서 일어나세요.
형사의 말에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져 왔다. 실제로 내 눈이 그렇게 반응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몸도 점점 무거워졌다. 침대가 두 쪽으로 갈라지고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 내 몸을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 형사가 황급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있다가 우르르 사람이 몰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누군가 내 얼굴에 산소 호흡기를 덮어씌웠다. 모든 게 꿈처럼 들려왔다. 정신 차려요. 형사가 내 손을 잡고 말했다. 그냥 날 이대로 내버려두세요. 깨어나도 난 살아갈 수가 없어요. 차라리 죽게 내버려 둬요. 간절하게 말했다. 형사의 손이 움찔거렸다. 내 말이 손으로 전달된 것일까. 나는 점점 사라지는 생각을 절박하게 끌어모았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요? 아니에요. 때론 인간은 동물보다 더 못한 존재로 전락하기도 해요. 인간이라고 느끼고 살 때만 인간인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으로 존중 받을 때만 인간인 거죠. 인간이 아닌 존재로 전락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단 일 초도 걸리지 않더군요. 내가 왜 칼로 그를 죽이려고 했냐고요? 더 이상 비참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한 심정을 아시나요? 앞으로 남은 시간들이 버러지보다 더 못한 삶으로 채워진다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형사님이 만약에 그런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나를 버러지로 전락시킨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어요.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나는 간신히 상반신을 일으켜 딱 버티고 서 있는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어요.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 없더군요. 그래도 악으로 깡으로 그의 멱살을 움켜잡고 그 힘을 이용해 몸을 일으켰어요. 오래 전, 아버지의 멱살을 잡을 때처럼 혼신의 힘을 다했어요. 그는 내 손을 떼 내며 발길질을 했어요. 이리저리 구르면서도 나는 악착같이 놓지 않았죠. 그의 눈빛이 흔들렸어요. 약간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요. 죽기 살기로 그의 멱살을 잡고 일어선 나는 주방 서랍장에서 칼을 꺼냈어요. 언젠가 독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인이 선물로 준 쌍둥이 칼이었어요. 한 번만 내 몸에 손 대봐. 죽여 버리겠어. 나는 칼을 두 손으로 잡고 휘둘렀어요. 이것 봐라. 어디 한 번 해 보시겠다고. 그래, 한 번 해봐. 그는 비웃으며 칼로 위협하는 날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왔어요. 날 죽여 봐. 네가 그럴 수만 있다면 말이지. 넌 사는 게 뭔지 몰라. 그는 목을 내 앞에 쑥 내밀면서 말했어요. 다가오지 마. 한 걸음만 다가오면 칼로 찌를 거야. 나는 소릴 지르며 뒷걸음을 쳤어요. 나는 칼로 휘두르며 현관 밖으로 나갔어요. 그만 모든 걸 그만두고 집을 나갈 속셈이었어요. 개 같은 년, 네가 뭐가 그리 잘났어? 뭐가 그리 잘 나서 날 무시해? 돈 좀 가지고 있다고 온갖 유세를 다 떨고. 그가 증오에 찬 말을 내뱉었어요. 넌 나한테 한 번 당해봐야 해. 그는 자신의 안위를 침범당한 들개처럼 으르렁거렸어요.
이제 괜찮아졌나요? 형사의 목소리가 내 말 사이로 끼어들었다. 네. 의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무슨 일인가요? 형사가 물었다. 일시적인 쇼크 상태에요. 이제 그만, 환자를 내버려 둬요. 지금껏 참아왔다는 듯 의사는 불만스럽게 말했다. 형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이봐요. 내 목소리가 들리나요? 나는 단지 더 이상 버러지로 전락되고 싶지 않아 칼을 들었을 뿐이에요. 날 전락시키는 인간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칼을 들었을 뿐이라구요. 나는 결사적으로 말했다. 오래 전, 아버지의 구둣발에 나가 떨어져 바닥에 널브러지고 있는 동안 나는 힘의 차이를 깨달았다.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은 강자는 약자에게 무자비하다는 거였다. 그것을 나는 전남편한테서도 보았다. 상대적으로 약자인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었다. 그냥 나와 그들 사이를 분리시키는 것 이외엔. 살면서 훈련했다. 나는 가능한 그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하지만 김무산, 그를 만나면서 경계심이 무디어졌다.
왜 그랬을까. 몇 번이나 들개처럼 사나운 그의 성향 때문에 혼줄을 뺐음에도 왜 조심하지 않았을까. 스스로 생각해도 기이할 정도였다. 마당에서 우리는 다시 팽팽하게 대치했다. 날 막아선 그는 내게 발길질을 했다. 그리고 손에서 칼을 뺏으려고 했다. 나는 칼을 뺏기면 모든 일이 끝장나기라도 하는 듯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 악력은 셌다. 강한 힘이 내 손목을 파고들었다. 통증이 온몸으로 퍼졌다. 나쁜 놈. 넌 진짜 나쁜 놈이야. 나는 내장에서 부패된 음식을 꺼내 씹어내듯이 말을 뱉어냈다. 그는 나를 노려보며 조소했다. 아니, 난 착한 사람이야. 나쁜 건 바로 너야. 넌 정말 나쁜 년이야. 언젠가 들은 듯한 서글픈 말이었다. 내가 왜 나쁜 년이야? 미친 놈. 나는 ‘미친 놈’이라는 말에 온갖 저주를 담았다. 잘 생각해 봐. 네가 어떤 여자인지. 넌 실컷 맞아도 싸. 그 순간 머리 뚜껑이 열리면서 현기증이 핑, 돌았다. 그와 눈빛이 서로 얽혔다. 찰나적인 순간, 나는 그의 눈에 담긴 차갑고 냉정한 마음을 읽어 버렸다. 오래전부터 내가 애써 잊고자 했던 아버지의 눈에서 발견한 눈빛이었다. 깊은 슬픔과 거대한 외로움으로 심장이 수천 갈래로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연민이 봇물처럼 터졌다. 곧이어 뜨거운 분노가 가슴에서 부글거렸다. 나는 그 눈빛을 도저히 용서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더 이상 그런 존재로 살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여태 일상에 떠밀려 살아왔지만, 내 혈관 속에는 분명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내 의지나 이성이나 교육을 넘어서는, 강렬한 그 무엇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오래 전, 아버지의 멱살을 잡게 한 내면의 그 무엇인지 몰랐다. 그러므로 나는 내 안의 광기를 분출했다. 나를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나를 버러지보다 더 못한 존재로 전락시킨 그를 응징해야만 했다. 나는 온힘을 다해 칼을 휘둘렀다. 단지 그랬을 뿐이었다. 그랬는데.
나는 천장에 매달려 있는 전등을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빛이 예리한 칼날처럼 내 눈에 내리꽂혔다. 기계로 생명을 유지한다고 해서 나는 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일어날 수도 없었다. 둥근 전등을 바라보고 또 바라봤다.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이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낯선 자의 꿈처럼 흘러갔다. 둥근 전등은 궤도를 이탈해 지구 가까이 온 행성처럼 눈앞에 다가왔다. 아무도 발 디딘 적이 없는 행성은 얼음처럼 차갑고 검었다. 나는 칼을 휘두를 때와 똑같은 힘으로 행성을 향해 몸을 던졌다. 나를 받아들인 행성이 다시 지구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행성을 통과해서 나아가면 무엇이 있을까.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3년 10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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