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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폭설 속에서'

소설가 김서련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3년 07월 20일
ⓒ 웅상뉴스
눈발이 점점 굵어졌다. 브레이크 페달을 밟으면서 속도를 늦추었다. 차바퀴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굴러갔다. 유리창에 달라붙는 눈발 너머 도로를 바라보다가 와이퍼의 움직임에 눈길을 주었다. 와이퍼가 지나간 자리엔 금세 눈발이 달라붙었다. 쓸어내도 눈발은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눈발은 갈수록 굵어졌다. 차선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을 와이퍼로 쓸어내면서 두 눈에다 힘을 주었다. 도로에는 차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엔 공장지대라서 평소에도 차가 뜸한 한적한 도로였다. 허옇게 덮여져 가는 도로를 응시했다. 아직 눈이 쌓여 운전을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건 시간문제였다. 한겨울에도 좀처럼 눈을 보기 힘든 도시였다. 이렇게 눈발이 날리는 것은 정말이지 몇 년 만에 처음이었다. 눈길에 운전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따라서 차바퀴에 감을 스노우 체인도 없었다. 용감하게 운전대를 잡고 차를 몰고 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이 넘실거렸다. 차바퀴가 미끄러져 사고가 날까 걱정도 되고 M에 도착하기도 전에 기력이 다하여 차를 도로 한복판에서 세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어찌해서 가도 문제였다. M으로 올라가는 길은 차 한 대가 간신히 다닐 수 있도록 폭이 좁고 구불구불했다. 맞은편에서 차가 오는 경우 중간에 만들어놓은 공터에서 기다려야 했다. 밝은 대낮에도 그런 길은 쩔쩔맸다. 그런 내가 눈이 오는데도 불구하고 차를 끌고 나오다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잔뜩 긴장하여 차를 운전한 탓인지 온몸이 욱신거렸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자신이 한심했다. 이런 험한 날씨에 기를 쓰고 M에 가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대체 내 몸속에는 무엇이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가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넌 정신병자야. 하고 말하던 그의 목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오 년 전, 그와 내가 잘 지낼 때였다. 나는 그의 일상을 일일이 체크하고 틈만 나면 함께 시간을 보내기를 원했다. 그런 일로 대판 싸울 때 그가 말했다. 넌 정신병자야. 그리고 그는 내게 결별하자고 했다. 나는 매달렸다. 풍산개처럼 그의 바짓가랑이를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렇게 사랑하는데 왜 헤어지니? 나는 일방적인 결별은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협박도 하고 억지도 부렸다.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입을 딱 다물었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일단 그에게서 먼저 연락이 올 때까지 참기로 했다.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도 그한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나는 그가 그리웠다. M에서 그와 함께 보낸 시간들이 그리웠다.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한계점에 이르렀을 때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며칠 뒤 그가 만나자고 연락을 해 왔다. 그렇게 해서 그와 나는 다시 M에서 만났다.

오늘도 바로 그런 날이었다. 며칠 전, 나는 견디다가 도저히 더 참을 수 없는 심정이어서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어제 그한테서 답장이 왔다. 내일 7시에 봐. 물론 장소는 M이었다. 지난 오 년 동안 되풀이해 온 만남이었다.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내내 전화 통화는 물론이고 메시지 한 번 주고받지 않다가 몸과 마음이 무르익으면 M에서 만나곤 했다. 그런 만큼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몇 십 년만의 폭설이 내린다는 일기예보에도 그한테 전화를 걸어 어떻게 할 것인지 차마 물어보지 못하는 것도 오늘을 간절하게 기다려왔기 때문이었다. 외진 산 속에 있는 M이라 자칫 잘못하면 눈이 쌓여 갇힐 수도 있었다. 단호한 그의 성격으로 봐서 어딜 다른 장소에서 보자고 하면 그냥 다음에 만나자고 할 게 뻔했다. 그는 그다지 아쉬울 게 없었다. 오늘 못 보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출발했지만 M으로 가는 것은 무리였다. 이런 식으로 운전해서 언제 도착할 지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나마도 지금은 눈이 금방 녹아내려서 다행이지만 나중에 도로에 눈이 쌓이기라도 하면 차가 꼼짝달싹도 못할 수도 있었다. 지금이라도 차를 돌려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결정을 내려야 했다. 무작정 밀어붙이는 것은 그리 좋은 해결책이 아니었다. 마음을 다잡고 그한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 소리만 공허하게 차 안에 울렸다. 핸들 위에 폰을 올려놓고 연락해, 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전송완료, 라는 글을 보고서야 오래 전의 일을 떠올렸다.

여름 내내 비가 내릴 때였다. 연휴 때 그에게 만나고 싶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비상이 걸려서 무척 바쁘다고 말했다. 그는 전력회사에 근무했고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비상근무를 해야 한다고 했다. 어쩌면 그는 오늘도 비상이 걸렸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미처 연락할 겨를이 없는지도 몰랐다. 그럴 확률이 높았다. 짐작하건데 구십구 프로였다.
확신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뜻 운전대를 돌리지 않는다. 아직 차가 움직이고 폭설이 온다고 하지만 일기예보가 안 맞아 눈이 그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일 프로의 가능성을 두고 볼 때 어쩌면 그도 M으로 가고 있는 중인지도 몰랐다.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는 상황에서 미리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자. 폭설로 차가 도로에 갇히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끊임없이 유리창에 달라붙는 눈발이 계속 시야를 가렸다. 뚫어지게 앞만 바라보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뗐다를 계속했다. 긴장은 무겁게 날 압박했다. 머릿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무슨 눈이 이렇게 오냐고, 투덜거렸다. 나도 모르게 욕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간신히 공장지대를 벗어나 사차선 도로로 진입했다. 차들이 쩔쩔 매고 있는 게 눈으로 들어왔다. 익숙하지 않은 폭설에 모두들 겁을 집어 먹은 것처럼 보였다. 날은 어두워지고 눈발은 점점 거세어졌다. 나는 브레이크를 더 자주 밟으며 속도를 줄였다. 와이퍼로 유리창에 들러붙는 눈을 열심히 쓸어냈다. 도로 옆은 산이었다. 운전하는 틈틈이 산을 바라보았다. 허옇게 쏟아지는 눈발 속에서 산은 딱 버티고 서 있었다. 거대한 짐승처럼 보였다. 그냥 산인데도 이상하게 자꾸만 그런 기분에 사로잡혔다. 나는 차문을 잠그고 핸들을 꽉 움켜 쥐었다. 마치 핸들이 무기라도 되는 것처럼. 산이 덮치면 핸들을 뽑아서 휘두를 것처럼 손에다 혼신의 힘을 모았다.

그래, 한 번 어딜 해보자.
핸들을 꽉 쥐고 두 눈을 부라리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웠지만 마음은 한없이 비장했다. 긴장감으로 뻑뻑해진 차 안의 공기에 숨이 막혔다. 여전히 눈발이 날렸고 여전히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앞차와의 간격도 어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체인도 하지 않았는데, 눈이 도로에 얼어붙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 같아선 그만 차를 세우고 싶었다. 너무 긴장이 돼서 운전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싶었다. 도로 한복판이든 어디든 차를 버려두고 걸어서 가고 싶었다. 백미러를 힐끔거렸다. 뒤쪽에서 눈을 뒤집어 쓴 코란도가 따라오고 있었다. 멈출 수도 없었다. 나는 사그라지는 힘을 끌어냈다. 가다 보면 뭐 어떻게 되겠지.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실 아침부터 마음이 무거웠다. 오래 일하던 직장을 그만두고 선배가 만든 잡지사로 자리를 옮긴 것은 몇 개월 전이었다. 지방 신문사에서 광고국장으로 일하던 선배는 은행 지점장으로 일하다가 명예 퇴직한 지인과 함께 주간 잡지사를 차렸다. 잡지사에서 내가 하는 일은 인터뷰도 하고 광고도 하고 잡지를 구독시키는 거였다. 월급은 얼마 안 되지만 인터뷰와 광고의 인센티브가 오십 프로였다. 실적에 따라 수입창출이 가능한지라 그리 나쁘지 않는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은 쉽지 않았다. 아침마다 대여섯 개의 신문을 모니터링하고 무슨무슨 회장에 당선된 사람이나 기사에 오른 사람을 찾아서 섭외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인터뷰는 그냥 해주는 게 아니었다. 협찬으로 육십 만 원 정도의 책을 구입해야 했다. 경기는 얼어붙어 있었고 사람들은 선뜻 돈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아침 여덟 시쯤 오늘 인터뷰하기로 약속한 성신기업 김 대표로부터 메시지가 날아왔다. 김 대표는 도자기 염료를 외국에서 수입해서 우리나라 도자기 회사에 납품하고 있는데, 오랜 경력으로 사업이 꽤 잘 되었다. 그만큼 후원금도 많이 내고 사회적인 활동도 많이 했다. 그가 관심을 갖는 부분은 비행 청소년들이었다. 주기적으로 교도소에 가서 봉사활동도 한다고 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을 내세우는 인터뷰를 못하겠다고 완곡하게 거절했다. 기대를 잔뜩 한 인터뷰라 실망은 했지만 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고 한두 번 당하는 거절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거절 방식은 다양했다. 단호하게 이러이러해서 그 일을 못하겠다고 거절하는 사람도 있고 처음에 할 듯 말 듯 하다가 아예 전화를 받지 않는 사람도 있고 거절하고 싶은데 대놓고 말도 못하고 한 번 생각해 보겠다며 꼼꼼하게 묻고는 다음 날 직원을 시켜 거절하는 사람도 있었다. 따라서 나는 이런저런 거절에 익숙해져 있고 안 되는 것은 훌훌 털어버리고 다른 인터뷰를 섭외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기분이 안 좋았다.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인터뷰 섭외하러 간다고 하고선 사무실을 나왔다. 날카로운 침이 살 속에 박혀 몸으로 파고드는 듯 신경이 예민해지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이른 시간이라 거리는 한적했다. 지난 몇 년 사이 거리는 많이 달라졌다. 차가 다니는 도로는 보도블록으로 대체 되었고 건물에 입점한 상점들의 간판은 세련되고 뭔가 모르게 달라져 있었다. ‘거절’이란 단어가 뇌 속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무수하게 거절을 당하면서 살아왔다. 아버지는 나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절했고 스무 살 때 동아리에서 만난 남자애는 잘 지내다가 갑자기 결별 통고를 했고 이런저런 일로 사람들에게 무수하게 거절을 당해 왔다.
그리고 그한테서도 거절을 당했다. 약 일 년간의 연애 끝에 그는 내게 결별 선언을 했다. 내가 자신에게 다가서는 걸 거절했다. 그럼에도 나는 여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단지 아직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이유로. 사랑에도 탄생주기가 있다. 태어난 것은 언젠가는 소멸되기 마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벌써 나는 그와 끝장이 나야 했다. 질질 끌지 말고 단칼에 잘라내야 했다. 왜냐하면 거절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는 왜 그를 끊어내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나는 M에서 보낸 그와의 시간을 끊어내지 못하고 있다. M에서 탐닉한 그의 몸을 끊어내지 못하고 있다. 정말 끊어내고 싶지만 생각뿐이었다. 내 몸의 일부가 된 듯한 그를 무슨 수로 분리해낸다 말인가. 어떻게 끊어내야 한단 말인가. 갑자기 모든 게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남이었다. 그가 내 몸의 일부가 될 수가 없었다. 내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서 그에게 매달려 있는 내 자신이 지긋지긋했다. 넌더리가 났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오 년 동안 매달리고 있다니. 오 년 동안이나 발정난 암캐처럼 그의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다니.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서자 드넓게 펼쳐진 바다와 낮게 내려온 하늘이 눈으로 들어왔다. 창가 쪽으로 걸어가 검은색 코트를 벗어 한쪽 등받이에 걸쳐두고 소파 깊숙이 앉자마자 다가온 메뉴판을 든 종업원에게 에스프레스를 주문했다. 평소에는 너무 써서 잘 마시지 않는데, 오늘은 그 쓴 맛으로 복닥거리는 속을 진정시키고 싶었다. 창 너머 하늘은 우중충한 구름으로 덮여져 있었다. 오후부터 폭설이 내린다고 하더니. 혓바닥에 감도는 쓰디쓴 맛을 음미하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행기 한 대가 굉음을 내면서 공중을 선회하더니 곧장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점점 작아지는 비행기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사무실을 나와 거리를 배회하다가 문득 건물 지하 주차장에 세워 둔 차를 끌고 여길 온 이유가 혹시 비행기를 보기 위해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어디론가로 향해 날아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는 게 좋았다.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을 때도 있고 뭔가 생각할 때도 있었다. 대부분 그냥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그러면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쓸쓸한 마음도 사그라지면서 기분이 한결 나아지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마음이 캄캄해져 왔다. 비행기는 사람들의 욕망이 원하는 목적지로 쏜살같이 날아가고 있었다. 한 번도 발 디딘 적이 없는 곳으로, 발을 딛긴 했지만 오래 발을 붙인 적이 없는 곳으로.

이 시간에 일은 안하고 갑자기 무슨 일이야?
어느새 들어왔는지 단이 맞은편 소파에 앉으면서 말했다. 오후 일정이 빡빡하다는 단에게 잠깐이라도 왔다 가라고 전화한 것은 어쩌면 비행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비행기가 허공 속으로 감쪽같이 사라졌을 때 문득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 단이 떠올랐다. 내 마음이 무거운 이유가 무엇인지, 내가 진정으로 갈구하는 게 무엇인지 이제는 그를 끊어내고 싶다면 어떻게 끊어내야 할지 단과 말하다보면 뭔가 문제가 풀릴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뒤따라온 종업원에게 카푸치노를 주문한 단은 회사일이 재미있는지 의례적인 안부를 묻더니 근데, 무슨 일이야? 라고 물으며 날 빤히 쳐다봤다. 그게… 말이야 …. 말하다가 나는 주춤거렸다. 단에게 털어놓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까지 차 올라있는데도, 입이 열어지지 않았다. 왜, 말들이 혓바닥에 달라붙어 있는지 의아했다. 하긴 단에게 어떤 말을 쏟아내든 내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감정이 해소되지 않을 터였다. 단은 오래 전부터 내게 그만 그와 끝내라고 충고해 왔고 지금 내 속을 털어놓으며 같은 말을 되풀이 할 게 뻔했다. 내가 원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단은 스푼으로 고운 거품 위에 올려진 초콜릿 가루를 휘휘 저었다. 한 달 전, 연하의 애인과 헤어지면서 단은 이전보다 더욱더 얼굴에 생기가 감돌았다. 허리선은 더 가늘어지고 얼굴도 더 갸름해졌다. 그 놈의 정 때문에 마음이 아프니 어쩌니 하면서 밤새도록 소주를 퍼 마신 게 불과 얼마 전이었는데, 그 사이 또 다시 연애를 시작한 것일까. 얼굴 좋아 보이네. 무슨 좋은 일 있어? 입을 열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단이 냉큼 대답했다. 응. 얼마 전부터 만나고 있는데, 여태 그런 남자 보지 못했어. 마치 지금까지 그 남자를 기다려온 것처럼 느껴져. 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 그래봤자 또 헤어질 거잖아. 나는 초콜릿 가루가 카푸치노 속으로 스며드는 걸 보면서 말했다. 이번엔 진짜야. 단이 말했다. 그 남자도 널 그렇게 생각해? 야, 이제 만났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단이 발끈 성질을 내며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인터뷰 섭외를 위해 전화를 걸 때가 많다. 신분을 밝히고 누군가의 이름을 대면서 바꿔 달라고 하면 대뜸 짜증내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전화가 하루에 몇 통씩 오는지 아세요? 제발 이런 식으로 전화하지 마세요! 라고 말하면서 소리 나게 끊어버리는 전화에 얼굴이 붉어질 때처럼 당황했다. 그나저나 너, 아직 그놈한테 연락하니? 단이 물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이 딱하다는 듯이 물끄러미 내 눈을 쳐다보았다. 찰나적이지만, 나는 단의 입가에 스쳐가는 한 가닥 냉소를 보았다. 순간 내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대체 뭐가 문제야? 이미 끝난 관계에 매달리고 있는 이유가 뭐니? 단이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 나라고 뭐 좋아서 그러는 줄 아니? 나도 지긋지긋해. 이대로 계속 가다간 미쳐버릴 것 같아. 그래서 그만두고 싶은데….
나는 반쯤 남아 있는 에스프레스를 단숨에 마셨다. 쓰디쓴 맛이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말들을 막았다. 단이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한테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백팔십이 훌쩍 넘는 키에, 딱 벌어진 어깨를 가진 그를 떠올렸다. 보통 남자들보다 머리 하나 더 큰 거구임에도 불구하고 표정은 한없이 순진하게 보였다. 멍하니 어떤 사물을 보고 있을 때는 아둔해 보이기까지 했다. 우묵한 눈에 무슨 생각을 담고 있는지 알 수 없을 때가 종종 있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이 좋았다. 곰처럼 우둔하면서도 순박한 표정이 좋았다. 순수한 청년 같은 미소를 좋아했다.

혹시, 너, 그 놈이 널 사랑한다고 생각하니?
단이 정색을 하고 물었다.
아니.
나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알고 있었다. 그가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한때 내 몸속으로 스며들어와 온몸의 혈관과 내장과 뼛속에까지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그에게 친밀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랬는데, 어느 순간 그는 멀어져 갔고 절대로 벌어진 간격은 좁혀지지 않았다. 우리가 일치하는 순간은 M에 있을 때였다. 그곳에 있을 때만 우린 일심하여 한 점을 향해 나아갔고 그 순간이 지나면 우린 싸늘하게 돌아섰다. 그와 나 사이는 우주의 끝에 있는 행성과 그만큼의 거리에 있는 행성처럼 멀어졌다.
그런데 왜?
단이 의문스럽게 물었다.
나도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어쩌면 내가 미치도록 그리워하는 것은 M인 것 같기도 하고 M에서 그와 함께 보내는 시간 같기도 해. 이상하게도 M에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 골치 아픈 일들도 생각나지 않아. 마치 아늑한 시골별장에서 한가하게 쉬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차분하게 안정되고. 그래서 가끔 이런 생각이 들어. 내가 집착하고 있는 것은 그가 아니라 M일지도 모른다는. 혹시, M에 뭐가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말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우중충한 날씨가 금방이라도 눈발이 휘날릴 것 같다. 낮게 내려온 진회색 구름 속으로 팔을 길게 뻗으면 순백의 눈이 아니라 얼음처럼 차가운 뭔가가 만져질 것만 같았다.
난 직장 그만두고 여길 떠날 거야.
불쑥, 한 번도 생각지도 않은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정말? 여태 그런 말 안 했잖아.
단이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방금 결심했어.
나는 또박또박 말했다.
그래? 잘 생각했어.
단이 아주 반가운 소식을 듣는 것처럼 반색을 표했다. 막상 그녀의 말을 듣자 이상하게 마음이 쓸쓸해졌다.
그런데, 정말 떠날 수 있겠어?
단이 물었다. 그 말의 속뜻은 이랬다. 너, 정말 그 나쁜 놈을 두고 떠날 수 있어? 언제부터인가 단은 단 한 번도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그를 칭할 때 그 놈 아니면 그 새끼였다. 단한테 그는 진짜 나쁜 놈이었다. 가지고 싶지도 않으면서도 버리지도 않는 그런 나쁜 놈이었다.
그래.
그 말을 하는데, 울컥 속에서 뭔가가 북받쳐 올랐다. 눈물이 나왔다. 단의 시선을 피해 재빨리 얼굴을 옆으로 돌리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화장실에 갔다 올게.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재빨리 걸어갔다. 눈물이 뺨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거울을 보면서 휴지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얼굴을 정리하고 자리로 되돌아간 나는 이런저런 얘기를 더 나누다가 일어났다. 커피숍에서 나온 단은 약속에 늦었다면서 급하게 걸어가고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서서 단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삼십 분 정도 걸어가자 강둑이 나왔다. 길은 공항까지 쭉 이어져 있고 양쪽으로 벚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오른쪽은 강이 있고 왼쪽에는 음식점과 부동산, 공장들이 드문드문 들어서 있고 그 너머는 논과 밭이었다. 그는 호젓한 이 길을 좋아했고 우린 시간이 날 때마다 이 길을 산책하곤 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먼지 같은 눈발이 허공에서 흩날리기 시작했다. 뺨에 와 닿은 눈발은 금세 녹아 없어져 버렸다. 이따금 걸음을 멈춰 입을 크게 벌려 눈을 받아먹었다. 입안으로 들어온 눈에서 약간의 맛이 느껴지는 것 같았고 눈 속엔 녹아 있는 뭔가가 내 몸 안에서 다시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추위에 오래 노출된 탓인지 몸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언젠가 본 영화가 떠올랐다. 한파가 몰아쳐 사람이 그 자리에 얼어붙어 산산조각이 나는 재난 영화였다. 오래 되어 영화의 줄거리는 희미해졌지만 사람과 건물들이 추위에 바싹 얼어붙는 순간 팍, 산산조각이 나는 장면만은 눈에 선명했다. 그 영화를 보면서 지독한 추위에 노출되어도 저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뼛속까지 얼어붙은 내 몸이 산산조각 부서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걸 상상했다. 그렇게 한순간 사라질 수만 있다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오래 전에도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지인의 소개로 그를 처음 만날 즈음이었다. 그때 나는 몹시 안 좋은 상황에 놓여 있었다. 동네에서 슈퍼를 하던 아버지는 일 억 넘은 빚만 잔뜩 남겨 놓고 목숨을 끊어버렸다. 집과 가게 대출금과 간간이 투자한 돈이었다. 어쩌다가 한 번씩 슈퍼 계산대에 앉아 있곤 했던 엄마는 세상 물정을 몰랐다.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고이 자란 꽃처럼 그렇게 살아왔던 엄마는 돈을 벌어야겠다며 회사에 다니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무슨 일을 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는데, 딱 두 달 일하곤 그만두었다. 아침 여덟 시부터 밤 아홉 시까지 종일 서서 일하는 게 너무 힘들다는 거였다. 이리저리 들어간 약값만 해도 만만찮았다. 잔업수당까지 한 달에 백오십 만원 받았지만 실제적으로 남은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엄마는 이런 저런 일을 시도했지만 천성적으로 몸이 약한 탓인지 무슨 일이든 오래 하지 못했고 일찌감치 회사를 그만 둔 오빠는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 내가 받은 월급으로 생계유지를 했다. 아버지에게 빌려 준 돈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수시로 자신들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에 대해 하소연하거나 협박했다. 상속 포기를 했기 때문에 채무를 이행할 의무가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네들은 포기하지 않고 전화를 걸어왔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을 때 그가 나타났고 어느 순간부터 그는 나의 유일한 도피처가 되었다. 현실이 힘들면 힘들수록 나는 그에게 몰입했고 집중했다. 그와 함께 있는 시간만큼은 모든 걸 잊을 수 있었다. 그랬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만약에 그날, 내가 그를 그렇게 몰아붙이지 않았다면 여전히 잘 지내고 있을까. 오 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 날, 나는 끊임없이 그를 의심하고 추궁했다. 그는 토요일에 아무 연락도 없이 잠적했고 그 날의 행적에 대해 나는 다그쳤다. 이제 그만해야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그를 다그치고 또 다그쳤다. 그 날은 그렇게 다그친 지 딱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넌 정신병자야.
한참 동안 내 말을 듣고 있던 그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행동을 보면 넌 정신병원에 가야 해.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마땅히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잠자코 그를 바라보는데, 한 가닥 차가운 기운이 내 등짝을 훑고 지나갔다.
그만 두자.
그가 말했다.
정말 그러고 싶어?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
그가 말했다. 나는 두 번이나 더 물었다. 정말 그러고 싶냐고. 그때마다 그는 정색을 하고 그래, 라고 대답했다. 그랬지만 나는 내일이면 그가 또 연락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너무 다그치니까 그만두게 하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날은 날씨가 안 좋아 비상근무를 했다고 했다. 너무 바빠서 미처 연락을 못 했다는 그의 말을 왜 그렇게 의심했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세밀한 부분도 놓치지 않고 떠올렸다. 그런 행동을 한 내 마음을 추적했다. 그 당시 나는 무엇 때문인지 견딜 수가 없었다.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고 매사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주위 사람들과 번번이 신경전을 벌였다. 뭔가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럴수록 점점 그에게 몰입했다. 내 일상은 그의 시간에 따라 움직였다. 내 모든 것을 그와 공유하고 싶어 했다. 날이 갈수록 불안감은 더욱더 깊어갔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날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심리적인 압박감에 짓눌린 나머지 나는 모든 걸 끝내고 싶었다. 그를 끝까지 추궁한 이면에는 그런 내 마음이 작용한 것은 아닐까. 회사에서 바쁘게 일하느라 깜박 연락 못했다는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던 것은 내 목을 바싹 죄여오는 불안감에서 벗어나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그만두자. 그의 말을 들었을 때 아주 짧게 스쳐간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이제 끝낼 수 있겠구나.

쿵, 갑자기 둔중한 충격이 왔다. 머리가 핸들을 박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정신을 차린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옆 차선에선 차들이 지렁이처럼 꿈틀꿈틀 기어가고 있었다. 차의 시동을 끄고 차문을 열었다. 거센 눈발이 얼굴에 와서 부딪쳤다. 아니나 다를까 사고였다. 뒤에서 바싹 붙어 오던 코란도가 내 차를 박은 것이었다. 나는 차 뒤편으로 가서 차의 상태를 확인했다. 코란도에서 내린 남자가 내 옆에 다가와서는 차가 미끄러져서 그랬다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범퍼와 트렁크가 찌그러져 있었다.
아니, 운전을 어떻게 해요?
나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갑자기 차가 미끄러져서… 죄송합니다.
남자가 고개를 연신 숙이며 말했다.
멀쩡한 차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죄송하다고 말하면 다예요? 수리에 들어가면 운전을 못할 텐데. 당장 출근은 어떻게 해요?
나는 과도하게 화를 냈다. 물론 차가 없으면 불편하겠지만 사고를 냈다 해서 이렇게까지 화낼 필요가 없었다. 약간 불편한 점은 있겠지만 차는 고치면 그뿐이었다. 게다가 이런 눈길에 사고가 난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남자의 잘못이라고만 볼 수도 없었다. 잘 알고 있음에도 남자를 몰아붙였다. 마음 한편으로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무시했다.

종일 내 마음속에서 북적거리던 감정들이 마침내 통로를 찾았다는 듯 한꺼번에 분출되었다. 나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렇게 차를 박으면 어떻게 하냐고. 내일 당장 출근해야 하는데, 이렇게 찌그러진 차로 어떻게 가냐고. 정비공장에 차를 맡길 시간도 없는데, 이렇게 차를 박으면 어떻게 하냐고, 이렇게 눈이 오면 운전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느냐고. 같은 말을 반복하는데, 갑자기 울컥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가 치밀어 오르더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눈물이 줄줄 뺨을 타고 흘렀다. 눈물과 눈은 뒤범벅이 되어 내 입속으로 들어왔다. 당황해하는 남자 모습이 눈으로 들어왔으나 눈물은 그쳐지지 않았다. 나는 막 도로 한복판에서 연인한테 결별 선언을 들은 것처럼 그렇게 줄줄 눈물을 흘렀다. 공중에서 흩날리는 눈발이 내 몸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하얀 눈이 내 몸에 소복소복 쌓였다. 나는 마치 눈 기둥이라도 된 듯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러다가 몸이 얼겠어요. 차는 내일 견인하도록 하고 제가 목적지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한참 나를 지켜보고 있던 남자가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말 잘 듣는 어린 아이처럼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에게 차 열쇠를 건네주었다. 온몸의 힘이 눈물로 다 빠져나갔는지 기력이 하나도 없었다. 내 차를 갓길에 세운 남자는 자신의 차로 다가가 조수석의 문을 열어 놓고 조심스럽게 내 어깨를 감싸고 차에 태웠다. 이어 운전석에 앉은 그는 보온물통에 커피가 있다면서 한 잔 따라주었다.
지금 시내는 엉망이라고 해요. 원래 눈이 오지 않는 곳이라서 그래요. 어쩌다가 눈이 조금만 와도 차들이 어떻게 할 줄 모른다니까요.
차 시동을 걸면서 남자가 말했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자 긴장된 몸이 어느 정도 풀렸다. 휴대폰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도 메시지도 없었다. 유리창에 시선을 고정시킨 남자가 목적지가 어디냐고 물었다. 나는 산 속에 있는 M에 간다고 말했다. 아, 거기요? 남자는 자신도 마침 그 쪽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면서 잘 됐다고 말했다. 시간은 점점 깊어가고 눈은 점점 그 몸집을 불리고 산과 들과 도로와 차는 하얗게 단장을 했다. 남자는 밤새도록 말을 들어줄 친구라도 만난 듯 술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산 속에 위치한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아내를 만나러 가는 중이라고 했다. 정신병원이란 말에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넌 정신병자야. 그의 말이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경계성 장애란 말도 되살아났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 나는 정말 병들었는지도 몰랐다. 그 곳에 정신병원이 있나요? 남자에게 물었다. 지난 오 년 동안 M에 들락거렸지만 정신병원을 본 적이 없었다. 산 속의 오목한 평지에는 서너 개의 모텔과 음식점, 술집과 노래방이 있을 뿐이었다. 네. 모텔촌을 지나 산 속으로 들어가면 있어요. 아, 네. 나는 잠자코 커피를 마셨다. 모텔과 정신병원이라. 겉으로 봐서 어울리지 않지만 안으로 파고들면 어쩌면 본질이 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자살을 두 번이나 시도했어요.
남자가 말했다.
전 아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을 알지 못했어요. 평소에 잠을 못자고 기운이 없어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봤지만 원래 몸이 약해서 그러거니 생각했거든요. 툭하면 죽고 싶다고, 자살할 거라고 대놓고 말했지만 귓등으로 흘러들었어요. 조금 힘들면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요. 뭐 그런 줄 알았죠. 또 다시 자살할 위험이 있어 병원에 입원을 시켰어요. 의사가 당분간 치료를 받는 게 좋다고 하더군요.
자살을 시도한 원인은 뭔가요?
그걸 잘 모르겠어요. 어릴 적 상처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아내한테 오빠가 있긴 한데 남이나 마찬가지예요. 양친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오빠 집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구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때부터 혼자서 살았다고 하더군요. 아내는 많이 외로워했어요. 내가 늘 함께 해 주기를 바랐어요. 하지만 나는 회사일로 출장을 자주 다녀야했죠. 한 달씩 혹은 몇 달씩 외국으로 돌아다녔어요. 아내한테 신경을 쓸 시간이 없었어요. 그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요. 아내가 그렇게 되도록 방치한 게 다 내 책임인 것 같구요.
남자의 목소리가 눅눅했다.
사는 게 다 그런 게 아니겠어요. 잘은 모르지만 당신 책임은 아닌 것 같아요.
나는 창밖으로 눈길을 던졌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건 남자의 책임이 아니었다. 그의 아내는 그냥 자신의 성격 때문에 그랬던 것뿐이었다. 남자와 나는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창밖으로 얼굴을 정지시킨 나는 그에게 그동안 일어났던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다는 유혹을 끊임없이 밀어내고 있었다. 거머리처럼 그한테 붙어서 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하면 무슨 말을 할까. 단처럼 당장 집어치우라고 할까. 내 정신을 의심하며 정신과 의사한테 상담 받아보라고 할까. 마음이 이제 그만, 하고 손사래를 칠 때까지 끝까지 가보자고 결심했지만 이렇게 끈질기게 집착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끝날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내 마음이 그만, 하고 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그만두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대체 끝이 보이지 않았다. 지겹도록 물고 늘어졌는데도 끝이 보일 기미가 없었다. 결국은 끝낼 시간은 내가 정해야 했다. 단호하게 결심하고 행동해야 했다. 그 길만이 내가 살 길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행동으로 옮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단에게 분명하게 말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여길 떠날 거라고. 그건 그를 끊어낸다는 말이었다. 두 번 다시 M에 가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결심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M으로 향했다. 거센 눈발로 도로에서 옴짝달싹 못할 상황이 될지도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M으로 차의 방향을 돌렸다.

근데 무슨 일을 하세요?
남자가 물었다. 잡지사에서 일하고 있어요. 좋은데 근무하시네요. 그렇지 않아요. 그만두려고요. 직장 생활이 다 그런 거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그리 많나요. 남자가 말했다. 요즘 나는 가끔 사는 것이 뭔지 모르겠어요. 살아가는 의미를 찾을 수 없어요. 무의미한 삶이나 죽음이나 똑같은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겁이 나요. 앞으로 내게 무슨 일이 올지도 모르겠구요. 나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주섬주섬 말했다. 정작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살아가는 의미라……. 별 것 있나요. 그냥 소중한 사람들과 오순도순 살아가는 것,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아닐까요.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한 것이 아닐까요. 일상에도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봐요. 까뮈의 소설에서 나오는 인물 있잖아요. 끊임없이 언덕 위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 말이에요. 그 시시포스가 행복하다는 그런 상상력 말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얼마나 불행하겠어요. 안 그럼 어떻게 힘든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어요? 남자는 다소 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 순간 감정이 솟구친 모양이었다. 왠지 마음이 짠했다. 유리창에 달라붙은 눈발이 조금씩 약해지고 있었다. 상상력이 필요해요.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상상력 말이죠. 남자의 말을 속으로 꼼꼼하게 되짚었다. 일리가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행복한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M에 그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세상과 뚝 떨어진 별천지에서 단 둘이 지내는 것처럼 행복하다,는 문장이 머릿속에서 만들어졌다. 나는 짧은 숨을 훅, 내뱉었다.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내게 손을 내밀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다는 걸 나는 인지하고 있었다. 내가 시작했으니까 끝도 내가 내야 했다. 그걸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눈발이 점점 약해졌다. 남자는 엑셀을 밟으면서 조금씩 속도를 높였다. 도로는 눈이 녹아 엉망이 되어 있었다. 유리창에 달라붙는 눈발 너머 산을 바라보다가 와이퍼를 바라보다가 흘끔 남자를 쳐다보았다. 서글서글하게 생긴 얼굴이 편안한 인상을 주었다. 한참 침묵이 흐르자 남자가 말을 꺼냈다. 스발바르 섬에서 다큐멘터리를 찍은 적이 있다면서. 고대 문명도 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고 바이킹들도 정복하지 못했고 이누이트 족들도 얼씬거리지 못했던 스발바르도 군도에 대해 한참 말했다. 요즘은 제법 사람들이 들락거리며 관광을 즐기고 있어요. 하지만 아직도 일 년 내내 그 곳에 머무는 사람은 이천 명 약간 넘어요. 대부분 석탄 광부들이고요. 남자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폰에 저장된 사진을 내게 보여주었다. 회색 빛깔의 해안 절벽 위로 살포시 내려앉은 흰 눈이었다. 아니었다. 쌍안경으로 본 그것은 흰 눈이 아니라 마치 하얀 점을 무수하게 찍어놓은 점묘화처럼 절벽 바위벽에 앉아 있던 수만 마리의 하얀 새가락갈매기였다.

그 곳에 사는 동물들은 포식자에서 보호자로 변하고 있어요. 녀석들이 서서히 인간들에게 길들여지고 있다는 거죠. 그건 독창적인 생존방식으로 가능성의 한계를 뛰어넘고 있는 거죠. 예를 들면 바렌츠부르그의 석탄채굴기지엔 세가락갈매기 수십 마리가 절벽 대신 폐건물 창턱에 임시로 둥지를 틀고 백야로 별 차이 없는 한낮이나 한밤중에도 갈매기들은 창턱을 박차고 나가 아래 항구의 물속으로 뛰어든다는 것은 살아가기 위해 환경에 적응하고 있다는 거래요.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변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봐요.
남자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문장을 머릿속으로 만들었다. 살아남기 위해 변해야 한다. 살아남으려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문장을 가지고 단락을 만들어 보았다. 내 몸속에는 내가 알지 못한 뭔가가 살고 있다. 나는 그것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내 몸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알고 있는 것은 그것이 끊임없이 불안과 두려움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내 몸의 일부다. 나는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설령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라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도 받아들여야한다.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앞으로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그래야만 살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무엇일까. 탐색해도 답을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일까. 어쩌면 내 몸 자체가 바로 미지의 영역이 아닐까. 한계 너머에 존재하는 것은 바로 내 자신이 아닐까. 내가 그를 끊어내지 못하는 것은 아니 M을 끊어내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그것 자체가 미지의 영역이기 때문일까. 그것 자체가 내 자신이기 때문일까.

차가 산속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남자의 목소리에 나는 생각에서 벗어났다. 창밖을 내다보니 어느새 눈이 그쳐져 있다. 구름 사이로 달이 보였다. 총총 고개를 내민 별도 보였다. 산과 들과 나무는 서로 뭉쳐져 거대한 눈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온 세상이 은빛으로 고요하게 빛났다. 차는 산 속으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아홉 시였다. 약속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그에게는 여전히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그가 먼저 M에 가 있을 확률은 거의 없었다. 지금이라도 택시를 집어타고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속으로 망설이며 망연히 산 속을 바라보고 있는데, 남자가 차를 세우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산길을 살폈다. 차가 갈 수 있나 없나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잠깐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도 밖으로 나왔다.

수북하게 쌓인 눈에 발이 푹푹 빠졌다. 달빛에 내 몸은 그림자를 만들었고 그것은 흰빛과 어울러져 고요한 풍경을 연출했다. 사위는 적막했다. 사물들이 모두 얼어붙은 듯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차량이 다니지 않은 길이라 녹지 않은 눈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푹신하고 부드러웠다. 눈은 발목이 빠질 정도로 쌓여 있었다. 이런 눈길을 헤치고 M까지 차가 올라 갈 수 있을까. 청명한 하늘은 낮게 내려와 있고 저 멀리 산 속에서 불빛이 흘러나왔다. 그곳은 몇 걸음에 닿을 것처럼 아주 가깝게 느껴졌다. 나는 가만히 서서 불안과 절망이 섞인 눈빛으로 불빛을 바라보았다. ‘정신 차려’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산길을 기웃거리던 남자가 뒤돌아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남자에게 나는 어떻게 보일까.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눈물과 고집과 분노와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여자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남자는 눈물과 눈으로 화장이 지어진 얼굴과 눈에 젖은 머리카락, 찬 기운에 상기된 얼굴, 얕게 잡힌 눈가의 주름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면서, 일말의 동정심을 품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차가 올라 갈 수 없을 것 같아요. 걸어서 가실래요? 남자가 내 쪽으로 걸어와서는 내 손을 잡고 부축했다. 의외로 따뜻한 손이었다. 나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잠깐이지만 남자도 날 바라보았고 난 무슨 말인가 했다. 아니, 했다고 생각했다. M에 왜 가는지 아느냐고 말이다. 남자는 그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남자의 손을 꼭 잡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산길을 걸어가는 동안 눈은 차디찬 흰빛을 뿜어냈다. M은 눈에 뒤덮인 나무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발은 푹푹 빠졌고 몇 번이나 쓰러질 뻔 했으나 그때마다 남자가 날 잡아 주었다. 구두에 묻은 눈을 털어 내면서 적막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보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지만 추위가 옷을 뚫고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덜덜 몸이 떨렸다. 이러다가 온몸이 얼어붙어 산산조각 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남자가 내 몸을 감싸 안았다. 나는 남자의 몸을 파고들었다. 평온한 느낌이었다. 얼굴을 들어 남자를 바라봤다. 언젠가 이런 일을 겪은 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문득 M에 그가 없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이렇게 마음은 흘러가고 그럼으로써 또 다른 누군가에게 뭔가를 기대할 것이고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그 누구의 탓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3년 0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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