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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가을전어'

소설가 김서련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3년 07월 14일
ⓒ 웅상뉴스
길거리에서 그녀를 픽업했다. 답답한 실내 커피숍보다 어딜 조용한 곳에 차를 세워 두고 얘기하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막상 그녀를 차에 태웠지만 딱히 갈 만한 데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디가 좋을까. 궁리하면서 차를 몰았다. 가다보니 차는 어느새 영주 터널을 지나 부둣길 고가도로를 지나고 있었다. 대형 트럭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지나갔다. 번영로를 타고 양산으로 빠질까, 생각하다가 한때 번성했지만 지금은 쇠락한 동해안 해수욕장을 떠올렸다. 수 년 전, 발길 닿는 대로 해안 도로를 따라 걷다가 황량한 풍경이 마음에 들어 창문을 열면 바다가 눈앞에서 출렁거리는 이층 민박집에서 1주일 정도 머문 적이 있었다.
그곳으로 마음을 정하고 곁눈질로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다. 오랜 생각 끝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만 해도 내장을 녹일 버릴 듯한 열기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전화를 받자마자 다짜고짜 좀 만나자는 내 말에 그녀는 아무 말도 묻지 않고 순순히 응했다. 그녀의 음성은 조용하고 차분했다. 약속 장소를 정하는 내내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 숨조차 쉬지 않는 듯했다. 통화종료를 누르고 난 뒤에도 나는 한참 동안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땅을 파고 있는 굴착기처럼 열기는 점점 주위로 퍼져가며 깊어졌다. 그랬는데. 예상 밖으로 마음이 담담했다. 그녀를 만나면 꾹꾹 눌러 두었던 열기가 터져 나와 그녀를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러고 싶기도 했다.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며 대체 왜 그런 짓을 했냐고, 연애를 했으면 했지 왜 그걸 만 천하에 공개했냐고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뭐냐고 악다구니를 부리고 싶었다. 정말 그러면 어쩌나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내면에 들끓던 열기가 한순간 싸늘하게 식었다. 상상한 것과 달리 그녀는 평범했다. 155 정도의 키에 머리는 손질하지 않아 퍼석거렸고 피부색은 까무잡잡하고 마른버짐이 퍼져 있었다. 눈은 오래 잠을 못 잔 듯 피곤해 보였다. 회색 폴로 티셔츠엔 보풀이 피어 있고 검은색 쟈켓의 소매 끝단은 닳아 있었다. 차 안에 정적이 한참 흘렀다. 조수석에 앉자마자 안전벨트를 맨 그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내내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 앞에서 그 어떤 감정이든 내비치지 않겠다는, 결사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자신의 일상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찍어 단편영화처럼 편집하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취미이고 그렇게 해서 만든 동영상이 수십 개나 된다는, 형사의 말이 귓속에서 맴돌았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영화로 만드는 게 꿈이랍니다. 동영상도 단순히 그런 취지에서 블로그에 올린 거구요. 형사의 말에 따르면 네티즌의 입소문을 타고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문제의 동영상은 그녀가 술김에 실수로 올렸다는 것이었다. 각종 매체에 공개된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S그룹의 중견간부인 김진수, 그러니까 내 남편은 지난 2년 동안 대학을 졸업하고 막 회사에 입사한 그녀와 연인관계로 지냈다. 그러다가 석 달 전,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아주 비열한 방법으로 그녀와의 관계를 끝장냈다. 문제의 동영상을 올린 날이었다. 그녀는 그날따라 그가 몹시 그리웠고 동영상과 사진을 보면서 추억을 회상했다. 그 순간만큼은 그의 비열한 행동을 몽땅 잊어버리고 오롯하게 그와의 기억만 떠올렸다. 매일 만나다시피 한 그들에겐 추억이 많았다. 지난 일들은 동영상을 통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녀는 그 중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면들을 편집해서 단편영화처럼 만들었다. 맨 처음 그와 개인적인 자리를 함께 한 장면도 넣었다. 신입사원인데도 불구하고 중요한 프로젝트에 합류되었을 때 그녀는 그에게 저녁을 대접했다. 2차로 노래방까지 갔다. 술에 취한 그는 노래방에서 그녀에게 키스를 하고 가슴을 더듬었다. 기분이 한껏 달아오른 그는 커피 한 잔 달라면서 그녀의 집에까지 따라붙었다. 그녀는 그 모든 것들을 캠코더로 녹화했다. 그녀의 집에서 둘은 처음으로 관계를 맺었다. 물론 커피 대신 캔맥주를 홀짝거리던 그가 강제로 그녀를 덮치긴 했지만 그녀도 내심 그걸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장면을 잘라내고 붙이고 하는 과정에서 그의 행동은 성폭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사실이 아니니까 별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그녀는 동영상을 자신의 블로그에다 업로드했다. 다음 날 아침, 정신을 차린 그녀는 문제의 동영상을 삭제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하룻밤 사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유투브에 올려진 동영상은 일만만파로 퍼져 나갔다. 예측하지 못한 일들이 발생했다. 그 동영상을 본 사람들은 그를 파렴치한 성폭행범으로 몰고 간 것이었다.

남편은 사이버 수사대에다 그녀를 고소했다. 불구속 입건되어 조사를 받은 그녀는 단지 그와의 추억을 기억하기 위해서이지 딴 의도는 없었다고 진술했다. 물론 그한테서 깊은 상처를 받았지만 그런 식으로 그의 인생을 망칠 생각은 없었다고. 수사는 잘 진전되지 않았다. 형사는 그녀에게서 아무 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정신과 의사를 도입시켜 그녀의 정신 검증을 의뢰해도 마찬가지였다. 몇 년 전, 그녀의 부모는 설악산에 단풍놀이를 갔다가 교통사고로 한꺼번에 죽었고 그 뒤 그녀는 우울증에 걸려 치료를 받긴 했지만 사회적인 장애를 일으킬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그녀의 대답은 단 한가지였다. 전 그냥 그와의 추억을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조용하고 착실하고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타입이었다. 고등학교 교사인 아버지와 전업 주부인 엄마 밑에서 고만고만하게 자랐고 사고방식도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물론 전과기록도 없고 사회적인 규범을 어긴 적도 없었다. 교통 위반도 한 적이 없었고 남을 이용하거나 피해를 준 적도 없다고 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그런 동영상을 찍은 것도 그것을 인터넷에 올린 것도 의외라고 했다.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형사도 의사도 그녀에게서 별다른 이상 증세를 찾아볼 수가 없다고 했다. 보통 사람들과 비슷했고 오히려 세상에 때묻지 않은 순수한 면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부정하지 않았으면 형사가 묻는 말에 있는 그대로 대답을 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그 사건은 각종 매체의 좋은 기사거리였다. 먹잇감을 찾아낸 사자처럼 달려들어 갈기갈기 찢었다. 여러 가지 추측과 의혹 등이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은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했다. 연일 특집 기사로 나눠져 그녀의 사건을 재조명했다.

그는 잘 벼린 회칼로 물고기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버리듯이 날 잘라냈습니다. 숨통을 끊어낸 물고기가 한참 버둥거리듯이 저도 버둥거렸습니다. 몸만 버둥거렸죠. 내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는데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우린 너무 잘 지냈거든요. 우린 매일 만났습니다. 저녁에 일정이 없으면 회센터에 가서 싱싱한 횟감을 떠와서 회비빔밥이나 초밥 등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그는 육류보다 해산물이나 회를 좋아했습니다. 밤에 술자리가 있는 날에는 새벽이라도 우리집에 와서는 내가 끓여 준 해장국을 먹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랬는데, 갑자기 그가 싸늘하게 변하더군요. 무슨 이유에서인지 공개적으로 대놓고 나를 무시하는 발언을 하고 막 대했습니다. 새로 추진되는 프로젝트에선 나만 제외시켰고 미팅에서도 번번이 깨졌습니다. 내가 제시한 안건마다 그는 요모조모 논리정연한 말로 따지고 반박했습니다. 그의 지적은 정확했고 나는 달리 변명할 말이 없었습니다. 업무적인 말도 다른 사람을 통해 시키더군요. 그런 일이 계속되자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대체 왜 그러는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습니다. 특별히 눈밖에 벗어날 만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업무를 소홀히 한 것도 아니고 특별나게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난감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전화도 걸고 메일도 보내고 문자도 보냈으나 그는 아무런 답장도 하지 않았습니다. 인생은 문제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내 앞에 가로 놓인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밤낮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전처럼 그와 잘 지내고 싶었습니다. 고심 끝에 나는 무조건 그에게 잘해 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가 까칠하게 굴거나 말거나 생긋 웃으면서 말도 걸고 휴게실에서 마주치면 커피도 뽑아주고 밖에서 돌아올 때마다 간식거리를 챙겨서 갖다 주고 수시로 챙겼습니다. 싸늘한 반응에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지만 어금니를 꽉 깨물었습니다. 회사는 그만두고 싶지도 않았고 그만 둘 입장도 아니었습니다. 말을 붙이면 그는 징그러운 벌레라도 보는 듯 얼른 자리를 피했고 커피를 타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간식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던져주었습니다.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구토를 꾸역꾸역 삼키고 또 삼켰습니다. 어쩌면 그의 행동이 의도적인지도 모른다는, 즉 스스로 회사를 그만두게 하려는 목적에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 번 끝까지 해 보자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습니다. 하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고역이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심정이었습니다. 아무런 미래도 희망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 주간 매체에 실린 그녀의 글이었다. 사람들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무수한 댓글이 올라왔다. 심지어 여성단체들까지 들고 일어났다.
동영상이 유포된 지 딱 한 달 만에 남편은 회사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남편이 죽고 난 뒤 밝혀진 일련의 일들은 그녀에 대한 수사를 더욱더 불리하게 만들었다. 남편은 일시불로 미리 받은 퇴직금과 아파트를 담보로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부동산 투자를 했고 크게 손실을 입었다. 오래된 단층 건물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다 빌딩을 세우는 일인데, 문제는 땅을 파헤치면 유물이 발견된 것이었다. 작업은 중단되었고 그 일을 책임 맡은 건축업자는 주주들의 돈을 가지고 외국으로 잠적했다. 그러한 일들이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갔을 거라고 수사는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변호사도 만나고 그녀의 주변 사람들도 만났다. 나는 남편의 죽음에 그녀가 결정적으로 역할을 했다고 믿고 싶었다. 그녀를 재판정에 세우고 싶었다. 그녀가 한 짓에 대한 댓가를 치루게 하고 싶었다. 그녀는 살인자였다. 지인한테서 남편의 동영상이 인터넷에 돌고 있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재활용센터의 광고를 따내고 있을 때였다. 차 안에서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본 나는 몇 시간 동안 꼼짝하지 않았다. 퇴근할 무렵 사무실에 들어가자 생활정보신문사 사장인 대학 선배는 말없이 차 한 잔을 타 주었다. 마주 앉아 내 눈치를 살피는 선배를 보고 나는 이미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걸 직감했다. 그 후의 기억은 질퍽한 진흙탕처럼 질척거렸다. 모든 일들이 영화처럼 눈앞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친정집 식구들은 전화기 너머에서 울먹거렸고, 시댁 식구들은 싸늘하게 침묵을 지켰고 내 아들이 그럴 리 없다. 대체 네가 어떻게 했길래 그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전화기를 통해 날 잡아먹으려는 듯이 다그치던 시어머니는 남편이 죽자 식음을 전폐했다. 장례식을 치루는 내내 병원 침대에 누워 링거를 꼽고 눈물만 주르르 흘렀다.

도시를 벗어나자 건물과 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푸른 바다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해수욕장은 기장을 지나서 있었다. 바닷가로 들어가는 입구는 차 한 대가 간신히 다닐 수 있을 만큼 좁았다. 한쪽 벽에는 페인트로 바다와 갈매기, 물고기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집들은 사람이 살지 않는 듯 온기가 없고 썰렁해 보였다. 차를 주차시켜 놓고 해안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텅 빈 민박집은 썰렁했고 잡초들이 마당에 드문드문 나 있었다. 가게도 슈퍼뿐이고 음식점은 거의 문을 닫았다. 내가 묵었던 민박집도 황량하기는 마찬가지. 파도가 거세게 밀려오는 바다와 하늘에 떠 있는 검은색 구름과 사람들이 떠난 집들이 연출한 삭막한 풍경은 그녀와 함께 있기엔 딱 어울렸다.
죄송해요. 전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요.
옹기종기 무리지어 있는 갈매기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녀가 말했다. 음성이 축축했다. 나는 대체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까지 그것도 몰랐냐고, 무지도 죄라는 걸 모르냐고 맵싸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몰랐다니. 나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그럼에도 이상하게도 그런 그녀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지인이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저지른 실수에 대해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흥미로운 것은 그녀와 함께 있는데도 불편하지 않고 왠지 마음이 편안했다.
제가 정말 잘못 했을까요?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한참 바다를 응시하던 그녀가 문득 생각난 듯이 물었다.
어떤 이유에서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봐선 그렇죠.
가능한 목소리를 순하게 했다. 날카롭게 공격적인 목소리로 말하면 그녀는 금세 방어자세로 들어가리라.
언니한테 정말 죄스런 마음뿐이에요. 전 단지…….
그녀가 스스럼없이 나를 언니라고 불렀다. 사모님도 아니고 언니라니. 기가 막혔다. 그녀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았다. 제 정신인지 아닌지 궁금했다. 우리가 어떤 관계인가. 기이하게도 그 말이 듣기 싫지 않았고 아주 오래 된 사이처럼 느껴졌다.
아무튼 행동에는 항상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인식해야죠. 그리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댓가는 치루어야 해요.
파도소리가 둘 사이의 정적을 깨뜨렸다.
댓가라…. 저도 내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건 나한테도 좋지 않았거든요. 오랫동안 그 일에 대해 생각했어요. 잘 알 수 없었어요. 부장님과의 기억을 간직하고 싶어서 그랬다지만 정말 그런지 잘 알 수 없었어요.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은 간간이 파도소리에 끊어졌다가 들려왔다. 사실, 그녀의 말은 맞았다. 그녀도 온전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도 가만히 두지 않고 마녀 사냥을 했다. 그녀의 모든 신상이 인터넷에 공개되었고 까발려졌다. 의도적으로 직장 상사에게 접근해서 이득을 취하려다가 뭔가 잘 되지 않자 복수했다. 애매한 한 남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살인자다. 사악한 여자다. 아니다. 아직 세상 때가 묻지 않은 순결한 영혼을 지닌 여자다. 순수하게 한 남자를 사랑했을 뿐이다. 모르고 한 일은 죄가 아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지켜야할 도리가 있는데, 그것을 어긴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엄히 처벌해야 한다. 등등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엉거주춤 서 있던 그녀도 두어 걸음 떨어져서 걷기 시작했다. 옷깃을 스쳐가는 바람은 쌀쌀했다. 엊그제 비가 온 뒤로 체감온도가 뚝 떨어졌다. 뭔가 일이 꼬여가는 느낌이었다. 내가 상상했던 것은 주로 내가 묻고 그녀가 대답하는 식의 장면이었다. 그녀의 변명이나 듣자고 만난 것은 더더군나 아니었다. 약속 시간 전까지 수십 번 생각하고 정리해 둔 말들이 달아났다. 낡고 허름한 횟집 앞 물고기가 그려진 수족관 앞에 잠깐 걸음을 멈췄다. 가게 안에는 탁자들이 겹겹이 올려져 있고 간판은 색이 바래져 무슨 글자인지 알 수 없었다. 철 지난 바닷가에서 내내 바다만 바라보다가 마지막 날, 이 횟집에서 전어회를 먹었던 기억이 났다.
근데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요. 부장님은 대체 어떤 분이세요?
갈수록 태산이었다. 그녀의 당돌한 질문에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본인이 더 잘 알잖아.
나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나왔다. 목소리에는 짜증과 답답함이 담겨져 있었다. 남편이 그녀에게 한 짓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업자득이라 생각했지 달리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전 부장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숨을 가볍게 내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난 헤어질 때도 예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적어도 잘 지낸 사람끼리는 아무런 말도 없이 단칼에 무 자르듯 싹둑 상대를 잘라서는 안 된다고 봐요. 평소에도 나는 가볍게 만나서 헤어지는 부류의 사람들을 경멸했어요. 그건 사람으로서 할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예전 남자 친구가 그랬거든요. 아무런 말도 없이 갑자기 내 앞에서 사라졌어요. 나중에야 나는 그가 다른 여자랑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죠. 그 뒤 나는 신중하게 상대를 골랐어요. 두 번 연애를 했는데, 이상하게도 남자들은 홀연히 내 앞에서 사라졌어요. 유령처럼요. 한동안 남자를 만나지 않았어요. 일에만 열중했죠. 그런 와중에 부장님을 만났어요. 알고보니 나는 정말 운 좋게 입사한 케이스였어요. 면접 때 사장님이 내게 후한 점수를 줬더군요. 입사 동기들은 다들 학교도 좋고 스펙도 좋았거든요. 그 흔한 해외연수 한 번 가지 못한 나와는 배경부터가 달랐어요. 처음엔 그런 게 뭐 중요하냐고 실력으로 들어왔으니까 똑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게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더군요. 함께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수다도 떨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여지는 풍경이었어요. 그네들은 끼리끼리 놀았어요. 보이지 않는 선 안으로 나를 받아들이는 착한 짓을 결코 하지 않았어요. 언제부터인가 내 위치를 알게 되었어요. 나는 부장님을 더욱더 따르고 좋아했어요.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부장님이 필요하기도 했어요.
그녀의 말은 이미 매체에서 읽은 거였다. 그녀의 스토리는 사람들의 구미에 맞게 각색되었다. 생생하게 그림으로 그려도 될 정도로 몇 번이나 읽었다. 다음에 이어질 스토리도 알고 있었다. 회식이 있던 날 그녀는 폭탄주를 마셨고 화장실에 가는 그를 뒤따라갈 용기를 냈다. 저기, 부장님. 잠시만요. 그는 앞을 가로막는 그녀를 멀뚱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간의 일을 물었다. 그래도 그러는 건 아니죠. 우린 서로 좋아했잖아요. 소중한 시간을 함께 보냈잖아요. 헤어지고 싶으면 헤어지고 싶다고 말하면 되잖아요.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그는 몸을 돌렸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주 선연하게, 생생하게 그녀의 귓속으로 들어와 머릿속에 박힌 그 말은 “에이, 똥 밟았어.”였다.
남편의 장례식은 조촐하게 치루었다. 장례식장 입구에는 서너 개의 근조화환만이 일렬로 세워져 있었다. 체면상 어쩔 수 없이 온 듯한 친지들은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네들은 내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검은 상복을 입은 나는 빈소 바닥에 고개를 푹 처박고 있다가 문상객이 오면 자동인형처럼 발딱 일어났고 화구 안에 들어간 남편의 시체가 고온에 녹아내리는 장면을 꼼짝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장례식이 끝난 뒤 나는 음식을 조리하지 않고 날로 먹기 시작했다. 야채는 씻어서 그냥 아작아작 씹어 먹었고 생선도 날로 먹었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던 날도 나는 횟집에서 떠온 횟감으로 회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다. 커다란 양은 대접에다 밥 한 공기와 횟감을 두툼하게 올리고는 상추와 양배추를 넣고 고추장으로 버무렸다. 시어머니가 햇볕에 바싹 말려서 보내 준 고추로 만든 고추장은 매웠다. 톡톡 쏘는 매운 맛에 입안이 확확 달아올랐다. 나는 질질 눈물을 흘리면서 음식을 입안에 넣고 어금니로 우물우물 씹어 먹었다.
동영상에선 남편은 그녀가 만든 음식을 아주 맛있게 먹고 있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남편의 표정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남편은 집에서 한 끼도 먹지 않았다. 남편은 생야채 쥬스로 간단하게 아침을 때우고 출근했다. 그리고는 밤 12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들어왔다. 어쩌다가 휴일에 끼니를 챙겨주면 한두 숟가락 뜨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랬는데, 어떻게 저렇게 행복한 표정으로 먹을 수 있을까.

하얀색 이층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퇴락한 해수욕장에서 단연 빛이 나는 건물이었다. ‘K와 J의 집’이란 팻말이 담벼락에 붙여져 있다. 한때 가요계의 맥을 짚었던 가수의 집이었다. 이층에서 기타 반주에 맞추어 누군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J가수의 히트곡이었다. 우리는 난간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노래는 우울한 풍경 속으로 퍼져나갔다. 기분이 자꾸만 저조해졌다. 쏴아,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소리가 귓가에 쌓일수록 더욱더 무거운 심정이었다. 가슴에다 깊은 굴을 만들고 그 속에 가둬 두었던 어떤 기억이 자물쇠를 부수고 밖으로 나오려고 꿈틀거렸다. 내가 원하는 것은 뭘까. 이미 망가지고 와해된 가족인데. 불꽃 축제를 보는 날이었다. 남편은 서울에서 내려온 손님들과 함께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배에서 불꽃놀이를 봤다. 아이를 불꽃 구경시켜 주겠다고 데리고 나갔고 내내 남편 곁에서 잘 놀던 아이가 한순간 사라졌다. 남편은 목이 터져라 아이 이름을 부르며 찾았고 아이를 찾는다고 보지 못했냐고 애타게 호소했지만 사람들은 펑, 펑, 펑. 공중에서 터지는 불꽃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아무도 그와 함께 아이를 찾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불꽃 축제가 끝난 뒤에야 사람들은 배 안을 뒤졌고 구조대원을 불렀다. 그 어디에도 아이의 흔적은 없었다. 아이가 물에 빠졌을 거라고 경찰은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때 우리 가족은 수천 미터 공중에서 떨어뜨린 유리창처럼 산산조각이 났었다. 그랬는데, 나는 탄원서를 올리고 그의 죽음에 그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밀어붙이고 있는 것일까. 대체 그녀를 만나서 뭘 확인하고 싶은 것일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이가 실종된 후 나는 남편과 헤어질 생각을 수백 번도 더 했다. 그를 보면 아이가 생각나서 도저히 같이 살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남편에게 악을 썼고 ‘실수였다구’ 라고 남편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집은 생지옥으로 변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는 없는 법. 나는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미 일어난 일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바에 차라리 모든 걸 잊고 순순히 따르는 게 앞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도움이 되었다. 그는 어떻게 지냈을까. 잘 모른다. 그의 존재를 느낄 때마다 마음속에서 뭔가가 폭발할 것만 같았다. 우리가 잘 지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서로를 느끼지 않는 거였다. 그래서 나는 그를 내게서 끊어냈다. 한집에 살지만 우리는 남남처럼 지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고통 속에서 살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물론 잘 살아가길 바란 적도 없지만. 그것은 나도 잘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무척 힘들었어요. 다행히 사장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봤지만 직원들은 아니었어요.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어요. 숨이 막혀 질식할 정도였어요. 그래도 꿋꿋하게 견뎠어요. 해고당하지 않는 한 버틸 셈이었죠. 시간이 지나가면 자연스럽게 그 일이 잊어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잖아요. 아무리 쇼킹한 사건도 일주일만 지나면 사라져버리잖아요. 부장님은 저보다 더 힘들었을 거예요. 이사회에 불러가서 해명도 하고 회사 홈페이지에 경위서를 쓰기도 했어요. 심지어 권고사직을 받았다는 소문도 들려왔어요. 그러고 있는데 부장님이 회사 옥상에서 뛰어내린 거예요. 우연찮게도 맨 먼저 부장님을 발견한 사람은 저였어요. 야근을 할 때였다. 몰려오는 잠도 깰 겸 회사 근처 편의점에 갔다가 돌아오던 길이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부장님을 발견했어요. 너무 놀라서 비명도 나오지 않았어요. 황급히 다가가서 그의 몸을 흔들었어요. 머리에서 흥건하게 피가 흘러내렸어요. 하지만 몸은 따뜻했어요.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순간 그동안 받아왔던 상처들이 말끔히 치유되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손끝에서 되살아나는 느낌에 잠깐 현실을 망각했어요. 119구급차를 부른 것은 때마침 잠깐 외출하고 돌아오던 같은 부서의 동료였어요. 그는 내가 왜 119에 전화를 하지 않고 얼쩡거렸는지 몹시 궁금해 하는 눈빛이었어요.
그녀는 말했다. 얼굴색은 어두웠고 목소리는 눅눅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귓속으로 흘러들어오는 노래에 집중하다가 숨을 살짝 내쉬었다. 정말 악의적 의도가 없었을까. 처음에 확신했던 생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흐려졌다. ‘실수였다구’ 그가 변명을 하면 나는 더욱더 화를 냈다. 뭐 실수? 어떻게 그게 실수야? 그렇게 말하면 다야? 그가 아이를 놓친 것은 용서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동영상을 업로드한 것은 순전히 실수였다고 했다. 그날따라 유난히 그가 그리웠고 동영상을 들여다보면서 눈물을 찔끔거렸고 자신의 생애에 단 한 번뿐인 아름다운 사랑인 것처럼 생각되었고 그래서 그 대단한 연애를 영상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어떤 한 가지를 생각하면 그것에만 몰입하는 타입인 그녀는 그것 이외의 다른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의 말이 맞는지 몰랐다. 그 일은 남편뿐만 아니라 그녀마저 사회에서 매장하는 일이었다. 갑자기 허기가 졌다.
배 고프지 않아요?
나는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언니는요?
우리 이러지 말고 뭐 좀 먹어요.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해안도로를 따라 쭉 걸었다. 해수욕장을 벗어나 32번 국도로 접어들자 서너 군데의 음식점이 눈에 들어왔다.
저길 가서 뭘 좀 먹어요.
네.
그녀는 얌전하게 대답했다. 누구에게나 예상하지 못한 불행 때문에 삶이 끝장났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있을 테고 대처하는 방법은 다 다를 것이다. 민박집에서 묵을 때 나는 내내 바다를 보면서 한 가지만 생각했다. 죽지 않고 사는 것. 어떻게든 죽지 않고 살아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한편 죽는 방법을 상상하기도 했다.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진다. 약국마다 돌아다니면서 모은 수면제를 한꺼번에 먹는다. 욕조에서 동맥을 면도날로 끊는다. 밧줄로 목을 매단다. 그 어느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완전히 목숨이 끊어지지 않고 의료 장비로 생명을 유지하는 것도 걱정이 되었다. 아니, 내내 한 가지 죽는 방법만 생각했다. 바다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는 것. 산다는 것은…. 죽지 않으니까 사는 것일까. 나는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뭘 먹고 싶어요?
나란히 붙어 있는 횟집과 조개구이집과 꼼장어 집을 보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전 아무거나 괜찮으니 언니가 먹고 싶은 걸로 정해요.
횟집 앞에는 가게 앞 유리창을 다 가릴 정도의 큰 수족관이 놓여 있고 벽 모서리에 ‘가을 전어’라는 간판이 부착되어 있었다. 바탕은 빨강이고 글자는 짙은 노랑이었다. 그것이 쓸쓸하면서 정감 있는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동시에 전어회가 먹고 싶다는 강한 식탐이 생겼다.
저 간판 보세요. 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지 않나요?
무슨 감정요?
쓸쓸하면서도 정감 있고 평화로운….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저걸 보니 갑자기 전어회가 너무 먹고 싶네요.
그래요. 우리 전어회에 소주나 한 잔 해요.
그녀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조금 전만 해도 몰랐는데, 그녀의 몸은 유연하고 단단했다.
몸매가 좋네요.
벗은 구두를 신발장에 넣으면서 말했다.
고마워요. 내내…….
그녀는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말없이 바다가 보이는 창 쪽으로 걸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녀가 입을 다문 이유를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원래 통통한 편이었는데, 그의 권유로 다이어트를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군살이 더덕더덕 붙어 있는 몸을 싫어했다. 아니 증오했다. 그녀는 생야채와 회만 먹고 하루에 한 시간 이상 운동을 했다. 덕분에 그녀의 몸은 균형이 잡혔다. 어느새 그의 생각이 그녀한테 옮겨 붙었다. 그녀는 몸에 군살이 조금이라도 붙으면 질겁했다. 군살이 아니라 흉물스러운 덩어리가 붙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인 여자가 다가와서 뭘 먹겠냐고 물었다.
전어회 한 사라고 소주 한 병 주세요. 아 참, 회는 세고시로 주시고요.
상이 차려지고 우리는 먼저 소주부터 마셨다. 차가운 소주가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갔다. 달달했다. 좀 있다 가져온 전어회는 먹음직스러웠다. 회를 기름과 마늘을 두른 막장에 찍어 입안에 넣어 꼭꼭 씹었다. 살과 함께 잔뼈가 아삭아삭 소리를 냈다. 고소한 맛이 입안에 가득 찼다. 지금 이 순간은 모든 걸 잊고 전어회를 씹는데만 집중하고 싶을 정도였다. 여행의 마지막 날에 먹었던 전어회의 맛이 고스란히 살아나는 듯했다. 그때도 뼈째 썬 살점을 어금니로 오래오래 씹어 먹었다. 달달하고 고소한 맛에만 열중했다. 혹시 남편도 회를 먹을 때 이 맛을 즐기는 아닐까.
저는 언니 눈빛이 마음에 들어요. 이제껏 제가 봐온 사람들하고는 뭔가 다른 것 같아요. 진실해 보여요.
고맙네요. 그렇게 봐 주다니. 근데 내가 보기엔 당신도 첫눈에 딱 봐도 그런 짓을 저지를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
지금 생각해보니…아마도 그때 뭔가에 씌인 것 같아요.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른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뺨이 약간 붉어져 있었고 눈빛이 그윽해졌고 어딘가 모르게 슬퍼 보였다. 나는 더 이상 대화를 진행하지 않았다. 잠깐 머릿속을 정리했다.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했다. 내게 남은 건 빚뿐이었다. 한 달 내로 아파트도 경매에 넘어갈 예정이었다. 은행 빚을 갚고 나면 전세값이라도 건질 수 있으려나. 어쩌면 상속 포기를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망망한 바다에서 난파되어 간신히 나무 조각만 붙들고 떠다니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사방엔 아무 것도 없었다. 발끝에 닿는 바닷물은 차가웠고 일직선으로 쏟아지는 햇볕은 따가웠다. 주위는 고요했다. 고요 속에서 핵이 있다면 그 핵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너무 고요해서 모든 사물이 다시 만들어지는 시간 같기도 했다. 고요 속에서 회가 입안에 씹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삭아삭.
근데 혹시, 무슨 말 들은 것 없어요?
그녀는 젓가락으로 회를 듬뿍 집다가 말고 나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녀한테 물을 성질의 질문도 아니었다. 다행히 그녀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열심히 회만 먹었다.
정말 맛있네요. 가을 전어는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한다더니.
한참 시간이 지난 그녀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순박해 보이고 어딘지 모르게 정이 가는 모습이었다. ‘가을 전어’ 간판을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쓸쓸하면서도 정감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한테서도 비슷한 분위기가 풍겼다. 소주 한 병을 비웠을 때 그녀는 고백하듯 말했다. 실제로 매일 날 음식을 먹는 것은 어려웠다. 그렇지만 기꺼이 그를 위해 생야채나 회를 먹었다. 정말 그를 좋아했다. 의지할 만한 누군가가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 하지만 똥 밟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모든 게 끝장났다는 걸 직감했다. 그의 감정이 싸늘히 식었다는 걸 알았다. 사실 언론에서도 모르는 게 있는데, 그건 그녀에게 부모한테 물려 받은 유산이 좀 있다는 거였다. 사고 이후 부모님 앞으로 꽤 많은 보험금이 나왔고 엄마가 개인적으로 들어놓은 보험도 제법 되었다. 그는 틈만 나면 그녀에게 부동산 얘기를 했다. 함께 투자하자고 했다. 그녀는 그럴 돈이 없다고 딱 잡아뗐다. 나중에야 그녀는 그가 이미 보험금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그녀에게 접근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씁쓸했지만 단지 좋은 감정만 간직하고자 했다. 사실, 그의 말대로 부동산에 투자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럴 생각도 조금 있었는데. 그녀는 오늘따라 소주가 유난히 달다면서 홀짝거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잔을 채웠다. 밖에서 들려오는 파도소리는 점점 세어졌다. 화장실에 갔다 오면서 바다로 난 유리문으로 다가갔다. 청명한 하늘엔 검은 구름이 길게 띠처럼 떠 있고 그 아랜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다. 눈이 부실 정도로 푸른 바다 때문에 풍경엔 움직임이 없는 듯 보였다. 움직임이 없는 풍경. 깊은 바다 속 같은 풍경. 한순간 바다 속에서 뭔가 불쑥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동시에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억누르고 두 눈을 크게 떠서 봤다. 아무 것도 없었다.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는 눈길을 아래로 떨어뜨린 채 가만히 빈 술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쓸쓸함이, 산더미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녀의 잔에 술을 따르고 내 잔에도 따랐다. 우리는 술잔을 서로 부딪치고 단숨에 입안에 털어 마셨다. 내가 알고 싶은 진실이 바로 이 순간에 있는 것 같았다.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3년 07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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