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전쟁의 시작'
소설가 김서련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3년 06월 20일
아이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무슨 아이가 그렇게 고집이 세요? 쬐그만 게 입을 뭐 같이 다물고 있으니. 부모가 와서 어떻게 좀 설득을 해봐요. 이러다간 오히려 상황만 더 악화된다고요. 다른 아이들은 벌써 조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갔는데. 전화를 걸어온 형사의 목소리에는 신경질이 잔뜩 담겨져 있었다. 아이가 한 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소처럼 꼼짝하지 않는다는 걸 나도 알고 있다. 유년 시절, 소를 몰고 들판에 나가곤 했는데, 가끔 소는 무슨 일 때문인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회초리로 엉덩이를 때리기도 하고 갖가지 방법으로 달래 봐도 움쩍도 하지 않아 발만 동동 굴리곤 했는데, 아이도 가끔 그랬다. 뭔 일 때문에 틀어지면 입을 굳게 다물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길 가다가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 자리에 뿌리라도 내리려는 듯 몸이 굳어지곤 했다. 아마도 아이는 입을 꽉 다물고 눈을 아래로 착 내리 깔고 있을 것이다. 어디 그것 뿐이겠는가. 눈에는 퍼런 독기가 풀풀 뿜어져나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방바닥에 쌓아놓은 철지난 옷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걱정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일이나 하자 싶어 옷장에서 꺼낸 옷들이었다. 엉덩이를 바닥에 철버덕 붙이고 두 다리를 양쪽으로 벌려 옷들을 종류별로 분류한다. 침대 위에 앉아 있는 고양이가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본다. 눈싸움이라도 하듯 나도 눈을 크게 뜨고 고양이를 빤히 바라본다. 어제 저녁 무렵, 마트에서 사온 고양이 잠자리와 똥, 오줌 가릴 모래상자, 분홍색 플라스틱 먹이그릇을 아이 방의 한쪽에 준비해 두고 그동안 아이 친구가 대신 보살피고 있던 고양이를 찾아왔다. 낯선 곳이라 그런지 고양이는 아이 방에서 맴돌면서 내내 내 눈치를 살폈다. 일하다가 틈틈이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갸르릉, 고양이가 기분 좋은 소리를 낸다. 그렇게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 했는데. 아이가 눈앞에 나타난다. 밥은 제대로 먹고 잠은 잘 자고 있는지. 휴대폰의 카메라로 고양이를 찍고 있는데, 멀리서 크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파트 나이만큼 오래 된 엘리베이터 소리다. 아이의 방은 바로 현관 옆에 붙어 있어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소리까지 다 들려온다. 아이가 인터넷으로 구입한 헐렁한 파란색 스웨터를 반듯하게 접어 돌돌 말으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제발, 멈추지 마.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목 안에서 맴돈다. 제발, 멈추지 마. 엘리베이터 소리에 바짝 신경을 쓰기 시작한 것은 유진의 장례식을 치루고 난 부터다. 평범하게 여겨졌던 엘리베이터 소리가 어느 순간 음습한 지하 세계에서 누군가 무거운 쇠사슬을 주렁주렁 달고 올라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발, 멈추지 말아라. 간절한 맘으로 중얼거리는데, 크르릉거리는 소리가 집 앞에서 뚝 멈춘다. 그와 동시에 나는 일하던 손길을 멈춘다. 방안은 정적으로 채워지고 머릿속은 생각들이 파닥인다. 앞집 젊은 맞벌이 부부는 아침 일곱 시쯤 출근한 터라 그네들을 찾아온 손님은 아닐 테고 신문은 끊어진 오래 됐고 우윳값은 은행 계좌로 보내주기로 했고…. 한 장면이 그 모든 생각들을 누르고 선명하게 부각된다. 아까 저 밑에서 크르릉, 소리가 들려올 때부터 떠올린 장면이다. 사실은 엘리베이터 소리가 들릴 때마다 떠올린 장면이기도 하다. 다름 아닌 유진의 장례식 날, 유진 엄마가 빈소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내내 고개를 숙인 채 오열하고 있던 장면이다. 곧이어 영구차에 실리는 관을 온몸으로 붙들고 놓아주지 않던 그녀의 모습도 떠오른다. 먼 발치에서 그 광경을 차마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장례식장 주차장에 세워 둔 차 안에 앉아 있던 내 귀에까지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온 처절한 울음소리가 공기를 타고 들려왔다. 나는 가만히 숨을 죽이며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스르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초인종 소리가 들려온다. 멈추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중얼거린다. 목소리는 입안에서 맴돌다가 침과 함께 목구멍 안으로 들어간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말고 도로 주저앉는다. 초인종 소리는 당장 문을 열지 않으면 문짝이라고 부수겠다는 듯 급박하게 집안의 적막감을 깨뜨린다. 집안의 모든 것들이 초인종 소리에 미세하게 균열을 일으키는 것만 같다. 그것은 어쩌면 내 몸이 균열하는 탓에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 모르지만. 이제 집안은 좀처럼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초인종 소리로 채워진다. 집안에 누군가 있다는 걸 확신하고 문을 열어줄 때까지 누르고 말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담겨져 있는 듯한 초인종 소리는 점점 급박하게, 점점 기세등등하게, 점점 악착스럽게 울려댄다. 초인종 소리가 내 몸에 스며들어 뱃속 깊은 곳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는 뭔가를 건드릴 것만 같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문득 안방에 있는 남편에게 생각이 미친다. 새벽 두 시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아이 방에서 얼쩡대는 날 본척만척,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안방으로 곧장 직행하더니 문을 소리나게 닫았다. 자고 있는 것일까.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진다. 유난히 잠귀가 밝아 아주 작은 소리에도 잠을 깨는 남편이었다. 누군가 자신의 잠을 깨우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그는 자다가 몸을 약간만 뒤척거려도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초인종 소리에 고함을 질러대기라도 한다면? 나는 할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너무 오래 앉아 있었는지 오른쪽 장딴지에 쥐가 내린다. 손으로 주물럭거리며 엉거주춤 현관으로 나가 방금 잠에서 깬 듯한 목소리로 누구냐고 묻는다. 세탁소입니다. 무뚝뚝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한 달 전에 맡겨 놓은 외출복을 떠올리며 무너지듯 안도의 숨을 내쉰다. 잠깐만요. 말하곤 소파 옆에 둔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내 들고 현관문을 열어준다. 아파트 상가 일 층 세탁소 여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몇 번이나 찾아왔지만 아무도 없어서요, 라고 변명 비슷하게 말한다. 건네주는 옷들을 챙겨 들고는 얼마죠? 하고 묻는다. 사만 오천원입니다. 나는 지갑을 열어 만 원짜리 지폐 다섯 장을 꺼낸다. 세탁소 여자가 돈을 셈하는 동안 무거운 침묵이 주위에 쌓인다. 나도 세탁소 여자도 묵묵히 만 원짜리 지폐에만 눈길을 던진다. 슬쩍 여자의 얼굴을 살핀다. 일에 지친 듯한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이 담아 있지 않다. 이 여자는 얼마 전 우리 아파트에서 일어난 사건의 전말을 모르는 것일까. 만약에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무심하게 날 대하고 있다면, 정말 내공이 강하거나 아니면 상대의 입장을 배려하는 착한 여자다. 조금 여자가 마음에 든다. 계산이 끝난 뒤 여자는 안녕히 계세요, 라고 입속말로 중얼거리더니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비상구 계단으로 내려간다. 물끄러미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현관문을 닫고 돌아선다. 입술이 바짝 말라 있다.
나는 정수기에서 냉수를 한 컵 받아 마시고는 주방의 길쭘한 창으로 바깥을 바라본다. 오래 전, 처음 입주할 때나 지금이나 산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아파트 건물은 똑같은 모습으로 굳건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니다. 사실 모든 건 변해 있다. 겉으론 잘 보이지 않지만 아파트 건물은 그때보다 더 낡았고 산에는 나무가 더 무성해져 있고 이웃들도 수시로 바뀌고 있다. 물론 나도 남편도 변했다. 예전의 우리가 아니다. 하지만 아이의 경우 완전 예상 밖이다. 어릴 때부터 고집이 센 것 빼고는 귀엽고 예쁜 아이였다. 중학생이 되면서 공부보다는 노는 데 더 재미를 붙이는 것 같았지만 유치원 때부터 친구였던 유진에게 그런 행동을 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친구에게 괴롭힘을 당해 자살하는 아이들에 관한 기사를 볼 때마다 마음이 짠하고 안타까웠는데, 그런 짓을 바로 내 아이가 하다니.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따지고 보면 전혀 조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집에서 논술을 가르치던 유진 엄마의 말을 어영부영 넘기지 않았다면 미리 손을 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는 유진과 한 팀이 되어 유진 엄마한테서 과외를 받았다. 한 번은 유진 엄마가 내게 전화를 걸어와 술이나 한 잔 마시자고 했다. 생맥주 집에서 그녀는 그간에 있어온 이야기를 쭉 늘어놓았다. 아이가 학교에서고 어디고 간에 유진을 괴롭힌다고 했다. 툭하면 볼펜으로 유진의 손등을 내리찍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이런저런 심부름을 시킨다고 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유진이가 가끔 그런 말을 했으나 워낙 친하다보니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지나쳤는데, 이번에 함께 수업을 해 보니 그게 아니라는 거였다. 엄마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도 아이가 유진을 괴롭힌다는 거였다. 그리고 수업 시간 내내 볼펜으로 방바닥을 찍어 아예 못 쓰게 해 놓았다고 했다. 아무래도 세나가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것 같아요. 세나가 학교에서 잘 나간다는 것은 알고 있죠? 유진 엄마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잘 나가다니? 뭐가요? 나는 혓바닥에 맴도는 말을 목 안으로 밀어 넣었다. 괜히 그녀에게 말문을 터 주어 아이에 대한 이런저런 말들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는 유진 엄마의 말을 귓등으로 흘러 보내지 않았다. 며칠 뒤 시간을 내서 아이와 함께 패밀리 레스토랑에 갔다. 오붓하게 단 둘이 식사를 한 지 언제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서먹한 얼굴로 침묵을 지키는 아이에게 나는 이것저것 챙겨주며 살갑게 말을 붙였다. 요즘 학교생활은 어떠냐. 친구들과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느냐. 선생님은 괜찮냐 등등. 아이는 빤히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말없이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콩알만 하게 조각조각 냈다. 그 눈빛은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왜 그래? 왜 이렇게 친절하게 구는 거야? 서슬 퍼런 아이의 눈빛에 압도당한 나는 끝내 유진에 대해서 물어보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그때 이미 조짐이 있었고 난 그걸 간파해야 했다. 사실 그런 아이의 행동이 마음에 안 걸린 건 아니었다. 신경이 쓰여 한 번 더 시간을 가진다는 게 빡빡한 일정에 쫓겨 다니다가 그만 잊어버렸다.
나는 안방 문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나무판대기로 덧대어 놓은 문은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처럼 굳게 닫혀 있다. 수 년 전, 부부싸움 끝에 뻥 뚫린 구멍을 막아 놓은 나무판대기처럼 아이의 이름이 언급된 유진의 유언장은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 자신을 집단폭행한 주동자로 아이를 지목한 유진은 우리 집이 훤히 보이는 맞은편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학교로 경찰서로 불러 다닐 때도 그는 내게 한 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내가 말을 걸면 침묵으로 응했다. 썩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지만 서로에게 잘못을 전가하면서 서로의 마음을 할퀴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을 바꿨다. 하지만 집안에 살얼음처럼 떠다니는 긴장과 적의, 분노 등의 기류들은 나를 압박했다. 문 손잡이를 살짝 돌린다. 생각 같아선 문을 박차고 들어가 대체 뭐하는 사람이냐고 소릴 지르고 싶지만, 숨을 고른다. 잘 행동해야 한다.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아이였다. 부모가 와서 꽉 다문 입 좀 어떻게 열어주세요. 형사의 말이 귓전에 맴돈다. 열린 문으로 방안 풍경이 눈으로 들어온다. 커튼이 쳐져 있는 방안에는 옅은 어둠이 깔려 있고 옷장과 화장대, 삼단 서랍장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이불을 둘둘 말고 누워 있는 남편을 둘러싸고 있다. 오늘 회사 출근 안해? 나는 부드러운 어투로 조심스럽게 말을 던져본다. 문 닫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버럭 소릴 지른다. 말 속엔 짜증이 빽빽하게 박혀 있다. 한순간 머쓱해진 나는 차마 못할 짓을 저지른 듯한 심정으로 잽싸게 문을 닫는다. 이어 스쳐가는 모멸감…. 대체 이 감정은 뭔가. 애써 파고드는 의문을 떨쳐낸다. 아이들이 연달아 자살하는 바람에 언론매체란 매체는 학교 폭력을 다루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를 일으킨 아이는 자칫하면 법정에 서야 할지도 모른다. 변호사를 선임해야 하는 건 아닌지 의논하고 싶은데. 남편은 아이에 대해 한 마디도 꺼내지 않고 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모르겠다. 왜 그러냐고 한바탕 속을 헤집고 싶지만 남편 얼굴을 보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몸 안에 시한 폭탄을 장치한 듯 위태로워 보였다. 잘못 건드렸다가 감당하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기라도 한다면.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정말 슬프고 가슴이 아프지만 유진은 죽었고 아이는 살고 있다. 백 살까지 산다고 하면 앞으로 팔십 오 년을 더 살아야 한다. 그런데 아직 출발도 하기 전에 첫발부터 잘못 디뎠다. 바로 잡지 않으면 남은 아이의 생은 지옥이 될 게 뻔하다. 그런데 저 인간은 왜 저러는 것일까.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분노의 불길이 치밀어 오른다. 생각 같아선 문을 와락 열고 들어가 이불을 확 벗기고 남편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다. 아이가 아무리 잘못했지만 그래도 자식이 아니냐고. 엄연히 따져보면 아이가 그렇게 된 건 우리 탓이 아니냐고. 당신이 뭐 잘한 게 있냐고. 하지만 나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한다. 자고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 백 번 이긴다는 말도 있다. 남편의 속셈을 모르는 현 상황에서 그런 행동은 오히려 상황만 더 악화시키리리다.
벽에 걸린 시계는 오전 열 시를 가리키고 있다. 형사한테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 간다. 경찰서는 버스로 15분 거리밖에 안 된다. 거실 붙박이 벽장에 옷들을 차곡차곡 넣어두고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화장품 샘플과 각종의 카드, 필기구와 노트 등을 마저 정리한다.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아이의 마음을 짐작해본다. 아이가 그렇게 고집을 피울 때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뭔가가 있다는 증거였다. 어릴 때부터 번번이 그러지 않았던가. 나중에 알고 보면 ‘아, 그것 때문에’ 라고 가슴을 칠 만한 이유가 있곤 했다. 한번은 아침 일찍 학교에 보낸 아이가 일 층 엘리베이터 입구에 버티고 서 있는 걸 발견하고는 할 말을 잃은 적이 있었다. 호되게 야단을 치고 대체 왜 그러냐고 물어봐도 아이는 불퉁한 얼굴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었던 나는 한참 실랑이를 벌이고 나서야 무심결에 내뱉은 말을 떠올렸다. 아침에 아이를 깨우러 들어갔다가 아무렇게 벗어 놓은 옷들과 과자 봉지와 만화책 등으로 난장판인 방을 보고 나도 모르게 혼잣말처럼 내뱉은 욕설을 아이가 듣고 만 것이었다.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유진 장례식 이후 첫 외출이다. 이십오 층에 멈춰져 있는 엘리베이터를 잠깐 쳐다보고는 비상용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갈 때마다 구둣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한다. 누군가 집안에서 내가 밖으로 나가는 소리를 들을까봐 신경이 쓰인다. 그런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다 그런 짓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래층으로 내려 갈수록 마음이 점점 불안해진다. 아직까지는 잘 버티고 있지만 어느 순간 그동안 쇠심줄처럼 질기게 붙들어왔던 것들을 놓아버릴 수도 있는 것. 살아오면서 내가 놓아버린 것들은 무엇일까. 초등학교 4학년 때 아이는 수학영재 시험에 합격했고 그 바람에 나는 다른 영재 엄마들과 어울려 아이에게 선행공부를 시킨 적이 있었다. 나중에 들어가는 돈을 도무지 감당해내지 못해 그만뒀지만. 그건 아이도 원하는 일이라 후회가 없었다. 지난 기억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낸다. 만 이 년의 연애 끝에 결혼한 남편과 신혼여행지에서 아이를 만들었다. 회사를 그만둔 나는 집안에 틀어박혀 살림만 살다가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갈 즈음 다시 사회로 복귀했다. 실제로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낸 것은 그때까지였다. 아이는 유치원에서 오전 여덟 시부터 오후 여섯 시까지 있었고 밤에는 내가 퇴근할 때까지 어린이집에서 놀았다. 일에 미치다시피 했던 나는 제대로 아이와 놀아줄 틈이 없었다. 그런 탓인지 아이에 대한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유일한 기억은 조금만 야단쳐도 집이 떠나라고 울어대던 모습뿐이다. 난감하긴 했지만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느새 횡단보도가 내 앞에 가로 놓여 있다. 아파트를 지나오면서 행여 아는 사람과 마주칠까봐 줄곧 땅바닥만 내려다보며 걸어온 탓인지 뒷목이 뻐근하다. 나는 한 손으로 목을 어루만지며 건너편을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린다. 단 일 초였지만, 내가 본 것은 유진 엄마였다. 아무렇게 차려 입은 옷차림에 머리가 산발 같고 초췌한 얼굴이긴 하지만 분명 그녀였다. 그리고 나는 유진 엄마도 나를 봤다는 걸 직감한다. 햇빛이 나뒹구는 도로에 한눈을 팔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그녀의 시선을 느낀다. 서늘한 독기가 공기를 가로 질러 일직선으로 내 몸에 날아와서 박히는 것 같다. 내 몸이 푸르디푸른 독에 잠식되어 흔적도 없이 녹아버리는 착각에 휩싸인다. 슬쩍 곁눈으로 건너편을 바라본다. 유진 엄마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그냥 그 자리에 서 있다. 이윽고 신호등이 바뀌고 나는 걷는다. 주위에 아무 것도 없는 듯 눈에 아무 것도 담지 않는다. 제발, 그냥 지나가라. 나를 아는 사람들은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모두들 자신의 생각을 한 마디씩 했다. 좋은 말이든 안 좋은 말이든 나는 그냥 흘러 보내지 못했다. 말들이 끝없이 내 안에 쌓이고 돌덩어리처럼 무거워졌다.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바싹 긴장한 마음이 실린다. 고작 일, 이분이면 걸어갈 횡단보도가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길처럼 길게만 느껴진다. 당신, 그렇게 잘 났어? 정적을 밀어내고 날 선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든다. 유진 엄마가 내 앞에 우뚝 서 있다. 천 년 만 년 꼼짝하지 않을 산처럼 거대하게. 그냥 지나치길 바랐는데. 나는 그녀를 마주 본다. 오랜 세월,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지하 세계에서 살아온 듯 음울한 기운이 그녀를 휘감고 있다. 낯설다. 이전에 내가 알던 그녀는 온데간데 없다. 유진을 따라 다른 세상에 간 것일까. 설마 내가 보고 있는 게 그녀의 빈 몸은 아니겠지. 괴물 같은 아이를 키운 주제에…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니? 창피하지도 않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서늘한 목소리다. 순간 온몸이 얼음처럼 싸늘하게 식어간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녀의 말이 아주 아득한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누군가 내게 말하는 것만 같다. 나는 아이를 잃고 죽고 싶은데, 당신은 참 태연하구나. 좋아? 당신 아이가 죽지 않아서? 내가 그때 말했잖아. 당신 아이가 우리 유진이 괴롭힌다고… 그랬는데… 왜 내 말을 건성으로 들은 거야. 왜 대처하지 않았어? 당신이 그때 조금만 관심을 보이고 아이를 잘 챙겼더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아이를 괴물로 키운 건 당신이야. 우리 아이를 죽인 건 바로 당신이라고. 알아? 미안해요. 나는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린다. 이 말밖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일까. 미안하다고? 미안하다면 다야? 사람들이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간다. 그녀도 나도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은 듯 꼼짝하지 않는다. 한 발짝만 떼면 몸이 닿을 거리인데도 깊고 넓은 강이 둘 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녀와 내가 도저히 합쳐질 수 없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강줄기가 아주 천천히 곡선으로 휘어지고, 또 휘어지고 휘어져서 끝이 서로 합쳐지는 광경을 떠올린다. 그럴 날이 과연 올까. 날카로운 경적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신호등이 어느새 붉은색으로 바뀌어져 있다. 미안해요.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한다. 정말 미안해요.
아니, 무슨 아이가 그래요? 형사가 툴툴거리며 날 면회실로 데리고 간다. 문을 열고 들어온 아이의 얼굴이 형편없다. 얼굴색은 누렇게 떠 있고 눈은 퀭하고 마른 버짐이 얼굴 전체에 퍼져 있다. 유치장에서 고생하는 빛이 역력하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나는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리고 아이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아이는 내 시선을 피해 눈길을 허공으로 던진다. 왜 그랬니? 뭐가 문제였어? 입안에 맴도는 말을 목구멍으로 꾹꾹 밀어 넣는다. 잘 지내니? 괜찮니? 말도 애써 어금니로 꽉 누른다. 아이가 무슨 말이든 먼저 꺼내기를 기다린다. 아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무거운 침묵이 점점 밀도를 높여간다. 휴대폰을 꺼내 갤러리에 저장된 사진을 아이한테 보여 준다. 고양이 사진이다. 침대에서 자는 모습, 두 눈을 동그랗게 뜬 모습 등등. 아이 눈빛이 희미하게 흔들리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는다. 고양이 키우고 싶어. 회사에서 한참 일하고 있을 때 아이가 문자를 보내왔다. 안 돼.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왜? 아이가 물었다. 나는 딱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답하지 않았다. 집에 오면 아무도 없고… 고양이 키우고 싶어‧… 친구가 생일 선물로 고양이를 줬단 말이야. 고양이 키우고 싶어. 고양이. 고양이. 고양이. 고양이. 고양이. 고양이. 고양이. 고양이. 고양이. 고양이 아이는 똑같은 문자를 수십 통 보내 왔다. 난감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였다. 마음이 쉽게 정해지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고양이를 키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유년 시설, 개와 토끼를 키워본 적도 있었고 딱히 동물을 싫어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게다가 바빴다. 회사 일만 해도 정신이 없었다. 집안일도 제대로 못하고 가족들 얼굴 볼 시간도 없는데 고양이라니. 누가 매일 먹이를 주고 똥을 치우고 보살피나. 아이는 자신이 하겠다고 떼를 썼다. 정말 할 수 있겠니? 나는 아이에게 물었다. 응. 아이는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하지만 난 아이를 믿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고양이를 집에 데리고 오지 못하게 했다. 만약에 그때 고양이를 키우게 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아이는 고양이를 보살피느라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까. 온갖 일들이 다 아이의 행동과 결부된다. 이렇게 했더라면, 저렇게 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모든 게 후회된다. 정말이지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아이의 행동도 행동이지만 내가 아이를 궁지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이었다. 어때, 귀엽지?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 아이 눈빛이 다시 고요해진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눈길을 다른 곳으로 던진다. 나는 한참 동안 아이를 물끄러미 응시한다. 침묵이 지속되고 있어서인지 아이가 화석처럼 그 자리에 굳어진 것만 같다. 더욱더 침묵은 깊어지고 주변의 사물들이 침묵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탁자도 의자도 형광등도 불빛도 침묵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간간이 바깥에서 들려오는 두런거리는 소리와 발걸음 소리마저 침묵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나는 침묵 속에 갇힌 채 사물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는 아이를 응시한다. 아이는 대체 침묵으로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경찰서를 나온 나는 택시를 타고 동해안 바닷가로 향한다.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모텔에서 그를 만나기로 했다. 그냥 집으로 바로 들어가겠다는데, 그는 기어이 나를 불러냈다. 먼저 방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곧바로 소파에 가서 앉는다. 잠깐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내 옆에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면서 캔맥주를 마신다. 아이는 어때? 한참 뒤 그가 입을 연다. 어떨 거 같아요? 나는 잔뜩 부은 목소리로 쏘아붙인다. 잠깐 침묵이 흐른다. 그래, 아이는 언제 집에 오는 거야? … 나는 입을 다문다. 여론이 워낙 시끄러워서 아이가 구치소까지 넘어갈 수도 있다는 형사의 말이 귓전에 맴돈다. 잘 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아이 때문에 그 애가 자살했다고만 볼 수 없잖아.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그 말을 듣자 속에서 뭔가 울컥거리면서 올라온다. 아이 얘긴 꺼내지 마. 혓바닥에서 맴도는 말을 맥주와 함께 삼킨다. 그의 입에서 아이 얘기가 나오는 게 어쩐지 자존심이 상한다. 화도 난다. 어찌된 일인지 똑같이 시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사하다. 아이들도 다 잘 되어 있고 와이프와도 사이가 좋다. 그에 비해 나는 어떤가. 한 마디로 파멸하기 일보 직전이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리모컨으로 채널을 이리저리 돌린다. 언제부터인가 모텔에 들어와도 우린 바로 침대에 올라가지 않고 술을 마시거나 음식을 먹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오래 만나오면서 부부처럼 편안해진 것인지 열정이 식은 것인지 잘 알 수 없다. 느긋하게 개그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그를 바라본다. 몇 년 전보다 얼굴 살집도 좋고 배도 많이 나왔다. 결혼과 동시에 한동안 일을 손에 놓은 탓인지 회사 일은 힘들었다. 일에 치이고 창창한 젊은 후배들한테 치이고 이리저리 치이다가 그만 포기하려고 할 즈음 어떻게 하다가 우연히 그와 연인이 되었다. 그리고 회사에서 승승장구 뻗어가는 그의 도움으로 나는 그럭저럭 일을 해나갈 수 있었다. 이제 그만둬야 하는가. 너무 오래 그를 만나왔다. 문득 작년의 일이 떠오른다. 그때도 나는 그와 함께 이렇게 모텔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집에 들어갔다. 밤 열두 시가 약간 넘어 있었다. 아이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여태 안 자고 뭐하는 거니?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아이는 대꾸하지 않고 컴퓨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마우스를 열심히 움직였다. 한 번 더 야단을 칠까하다가 잠자코 안방으로 들어갔다. 스위치를 올리자 파란색과 주황색 이불이 깔려 있는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도 그저께도 침대는 아침에 나갈 때와 똑같은 광경을 연출했다. 침대에 걸터앉아 반듯하게 펴 놓은 이불을 만지작거렸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마음이 공허해졌다. 남편과 언제 한 이불을 덮고 잤는지 까마득했다. 한 침대에서 자지만 우린 각자의 이불을 덮고 잔다. 서로 몸이 닿을까봐 조심하면서. 한 이불을 덮고 잘 때는 뒤척이다가 몸이 닿으면 슬쩍 끌어안곤 했는데, 그런 기회마저 차단되었다. 남편도 나도 그 점에 대해선 서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샤워를 하고 거실로 나왔다. 아이는 여전히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안 잘 거야? 나는 나지막하게, 하지만 힘을 실어 말했다. 아이가 불만스럽게 고개를 치켜 들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무슨 날인데? 말을 꺼내놓고 난 뒤 아차 싶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아이 생일이었다. 깜박 잊고 있었다. 새벽 두 시까지 영업하는 대형 마트를 떠올렸다. 집에서 차로 이십 분이면 충분히 갔다올 수 있었다. 어쩌나…미안해. 엄마가 깜박 잊어버렸어. 지금이라도 케잌 사올까? 지금 몇 시줄 알아? 열두 시 넘었어. 아이는 컴퓨터를 끄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뒤따라 들어가면서 아이를 안았다. 아이가 거칠게 내 팔을 뿌리쳤다. 엄마 맞아? 아이가 쏘아붙였다. 맞지. 근데 어떻게 하나밖에 없는 딸 생일도 잊어버려? 그리고 급식비는 왜 안 내는 거야? 오늘도 선생님이 명세서를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줬단 말이야. 그랬어? 은행에 돈이 들어 있는 줄 알았는데. 공과금 이외에 사용하지 않는 통장이라 깜박했나 봐. 미안해. 아이가 침대 속으로 들었다. 나는 잠깐 안쓰러운 기분으로 아이를 바라보다가 전등을 끄고 방문을 닫는데,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아이 말대로 난 엄마가 맞긴 한가.
현관문을 열자 고양이가 쪼르르 달려 나온다. 나는 거실 불을 켜고 잠깐 머뭇거린다. 현관에 구두가 없는 걸 봐서 남편은 집을 나간 모양이다. 아이 방으로 들어가 전등 스위치를 올리자 고여 있던 어둠이 순식간 사라진다. 아이 침대에 누워 머리맡에 쌓여 있는 만화책을 뒤적거린다. 일본 순정 만화다. 아이 베개에다 얼굴을 묻는다. 아이 체취를 맡으려고 하지만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 사실은 아이 체취가 생각나지 않는다. 아이를 언제 포옹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아이는 혼자 저녁을 먹고 수학학원과 영어학원에 갔다. 학원 선생님들 말을 들으면 아이가 가끔 결석을 하긴 하지만 그런대로 따라하는 편이라고 했다. 그러면 됐네요. 그 말에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면 됐지 뭐. 내 말을 들은 남편도 그렇게 말했다. 둘다 아이 공부에는 그다지 욕심이 없는 편이었다. 남편은 철이 들면 공부는 다 알아서 한다면서 건강하게 자라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말하곤 했다. 물론 남편은 잘했다. 아이와 함께 밥 먹을 시간도 없고 숙제를 봐줄 시간도 없고 대화할 시간이 거의 없지만 그래도 외국이나 어딜 출장 갔다 오면 아이가 좋아하는 선물은 꼭 챙겨왔다. 바빠서 그렇지 시간이 나면 아이와 잘 놀아줄 자상한 아빠였다. 그 점에 있어서 나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새벽,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안방으로 곧장 가던 남편을 떠올린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아이 문제로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남편이 걱정 된다. 남편에게 전화를 건다. 조용필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끝까지 듣고 있다가 문자 메시지를 날린다. 어디야? 아무런 답이 없다. 대체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잘 벼린 칼날이 박혀 있는 담벼락을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는 듯한 두려움과 불안이 강하게 밀려온다. 냉장고 문을 열어 소주를 꺼낸다. 집에서 술을 잘 마시지 않지만 마트에 갈 때마다 술을 꼭 한두 병씩 산다. 언제든지 술을 마시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해서 사 놓은 술이 종류별로 다 있다. 소주, 맥주, 와인, 동동주, 복분자 등등 무슨 술을 마실까 궁리하다가 소주를 꺼낸다. 소줏잔 대신 물컵에다 가득 따른다. 찰랑거리는 소주를 조금씩 삼킨다. 목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소주가 오늘따라 쓰디쓴 약처럼 느껴진다. 나는 독을 마시듯 술을 마신다. 집안은 깊은 적막에 쌓여 있다. 바깥에서 엘리베이터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바싹 신경을 세운다. 크르릉거리는 소리는 집 앞에서 멈추지 않고 곧장 올라가거나 아니면 저 밑 어디에선가 멈춘다. 나는 술을 홀짝거리면서 남편에게 전화를 건다. 노래를 끝까지 듣고 있다가 통화종료를 누르고는 또 다시 전화를 건다. 몇 번이나 전화를 걸고 문자를 보냈는지 모르겠다. 마침내 남편이 전화를 걸어온다. 어디야? 나는 약간 단단한 목소리로 묻는다. 대답 대신 거친 숨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휴대폰을 단단히 움켜쥔다. 아이 방에서 자고 있던 고양이가 재빠르게 뛰어오더니 내 발을 이빨로 물어뜯는다. 별일 없지? 나는 목소리 톤을 바꿔 부드럽게 말한다. 그래. 남편은 어둡고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고양이가 자꾸만 내 발을 물어뜯어. 나는 뜬금없이 고양이 얘기를 꺼낸다. 남편은 침묵을 지킨다. 나는 몸을 숙여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갸르릉갸르릉. 고양이의 목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근데…. 나는 무슨 말인가 꺼내려다가 바깥의 어둠을 바라본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삼켜버린 듯한 검은 어둠이 날 바라본다. 검은 어둠 속에서 아이의 굳게 다문 입이 둥둥 떠다닌다. 순간접착제로 붙인 듯한 입이 한두 개가 아니다. 수십 개, 수천 개의 입이 어디에선가 꾸역꾸역 나타난다. 병자처럼 파리한 입은 몹시 지쳐 보이고 피곤해 보인다. 오늘, 아이 면회 갔다 왔어. 나는 말을 내뱉은 뒤 가만히 숨을 죽인다. 아무런 대답이 없다.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지 않아? 그는 숨조차 쉬지 않는 듯 조용하다. 진술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아이가 한 마디도 하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고.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그래서? 착 가라앉은 남편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다. 그동안 산발적으로 흩어졌던 생각들이 일목요연하게 한순간 정리가 된다. 잘 알 수 없었던 일들이 선명한 그림으로 그려진다. 넌 정말 나쁜 놈이야. 알아?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음울하게, 차갑게, 말을 어금니에서 잘근잘근 씹어내듯이 내뱉는다. 넌 죽어서 지옥에나 가라. 전화기 너머, 숨소리가 뚝 끊긴다. 무거운 침묵이 쌓이고 한참 만에 남편이 입을 연다. 그 애는 악마야. 살인자야. 나는 한순간 잘못 들었는가 싶었다. 악마라니. 살인자라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지금 그게 말이라고 하는 거야? 그럼 당신은 뭐야? 당신도 악마야?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지금까지 뭘 잘했다고. 개 새끼…, 넌 정말 개새끼야. 그동안 억누르고 있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솟구쳐오른다. 참아야 해. 어디에선가 목소리가 들려온다. 참아야 해. 아이를 위해서 참아야 해. 나는 물컵을 개수대에 집어던진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에 정신이 약간 돌아온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남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서로 힘을 모아 아이를 도와야 한다. 이건 전쟁이다. 전쟁의 시작이다.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문다. 나는 고무장갑을 끼고 개수대와 바닥에 떨어진 유리 조각들을 재활용 쓰레기봉투에 담고 빗자루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유리 가루들을 쓸어 담는다. 고양이가 줄래줄래 날 따라다닌다. 내 발가락을 이빨로 물고 두 다리 사이로 빙빙 돌아다닌다. 유리조각을 치우고 내친 김에 냉장고와 전자레인지, 밥통의 누런 손때를 닦아내고 버릴 것은 버린다. 말끔하게 치워진 부엌을 바라보다가 아이 방으로 간다. 몇 년 동안 닦지 않은 창문을 볼 때마다 마음이 걸렸었는데. 나는 의자를 딛고 올라선다. 손에 쥔 걸레로 창틀에 들러붙어 있는 검은 먼지를 닦아낸다. 반질반질 윤이 날 때까지 창을 닦고 또 닦는다. 어느새 주위엔 새벽빛이 쌓여 있다. 면회 시간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화석처럼 굳어져 있던 아이의 투명한 유리창에 새겨진다. 강해져야 해. 입속말로 중얼거린다. 고양이가 길게 목을 빼고 그런 날 빤히 바라보고 있다. |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3년 06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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